“인권위가 내란 동조 조직으로 남는 게 두려워 용기 냈다”

전지현 기자

‘윤 방어권 의결’에 직원들이 사과…문정호 노조 위원장

문정호 국가인권위원회 노조위원장이 지난 14일 서울 중구 인권위원회 인근에서 현 인권위 상황과 직원들의 심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문정호 국가인권위원회 노조위원장이 지난 14일 서울 중구 인권위원회 인근에서 현 인권위 상황과 직원들의 심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전원위 안건 통과 이후 내부선 ‘인권교육 어떻게’ 등 우려 쏟아져
노조 가입 여부 떠나 50여명 동참…“부끄러움 남기고 싶지 않았다”

공무원은 정치적 중립과 품위 유지의 의무를 진다. 상명하복에 익숙하며, 묵묵히 일하고 개인을 앞세우지 않는다. 조직으로 일하기에, 신분을 드러낼 일도 없다. 국가인권위원회도 마찬가지다. ‘인권을 지킨다’는 조직의 사명이 여느 기관과 다를 뿐 이곳 역시 그 운영과 관행, 문화가 모두 공직의 틀에서 굴러가는 곳이다.

그런 인권위의 평범한 직원들이 지난 11일 국민 앞에 섰다. 전날인 10일 인권위 상임·비상임위원들이 모인 전원위원회에서 ‘윤석열 대통령 방어권을 보장하라’는 취지의 안건을 의결한 뒤였다. 인권위 직원 50여명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시민 인권 대신 권력자의 법익을 지키라는 인권위원들을 대신해 국민에게 하는 사과였다. 직원들이 이런 규모로 공개행동에 나선 것은 인권위 역사상 유례가 없었다.

문정호 전국공무원노동조합 국가인권위원회지부장은 당시 기자회견에서 얼굴을 드러내고 가장 앞서 문제를 제기했다. 문 위원장은 지난 14일 서울 중구 인권위 인근의 한 카페에서 경향신문과 만나 “인권위가 내란에 동조하는 조직으로 남는 것보다 두려운 건 없었다”고 말했다.

직원들은 지난달 19일 발생한 서울서부지법 난입·폭력 사태가 인권위에서 재연될 것을 우려했다. ‘윤석열 방어권’ 안건이 상정된 지난 10일 인권위 건물에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몰려들어 회의장 복도를 점거하고 지나가는 이마다 “직원이냐” “○○○ 욕해봐라”는 등 사상 검증을 벌였다. 문 지부장은 동료 직원들의 안전을 위해 각 층을 돌아다니며 상황을 살폈다. 그는 “‘무력을 쓰겠다’는 등 폭력을 조장하는 발언이 대부분이었다”며 “(윤 대통령 지지자들은)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이 내리지 못하게 막는 걸 재미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 방어권 안건 수정 의결은 직원들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안건 제출자 중 한 명인 김종민 위원의 사의 표명, 애초 발의자에 이름을 올렸던 강정혜 위원의 철회가 이런 관측에 힘을 실었다. 안건을 주도한 김용원 상임위원과 늘 보조를 맞추던 이충상 위원이 이번 안건에서는 반대 견해를 밝혀온 것도 부결을 기대하게 했다. 문 지부장은 “안건 부결 시 노조 차원에서 낼 성명을 준비했을 정도”라며 “찬성 위원들이 강 위원을 집요히 설득하고, 안창호 위원장이 이를 방관했다”고 말했다. 김용원·이충상·강정혜·이한별·한석훈 위원이 찬성 뜻을 밝히자, 안 위원장까지 찬성표를 던지며 의결 정족수 6명을 채웠다.

인권위 내부에선 ‘참담하다’는 반응이 쏟아졌다고 한다. 직원들은 ‘내란에 동조하는 안건을 찬성시킨 위원회에 무슨 낯으로 다니겠나’ ‘앞으로 인권교육을 어떻게 하냐’는 우려를 나눴다. 고심 끝에 지난 11일 오전 문 지부장이 ‘관련 회의를 개최하겠다’고 동료들에게 공지하자, 노조 가입 여부와 상관없이 수십명의 직원이 모였다. 그중 그날 오후 바로 시간을 낼 수 있는 50여명이 기자회견에 동참했다.

문 지부장은 “시민들이 제기하는 많은 수의 진정은 ‘이미 수사·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쉽게 각하된다”며 “화려한 변호인단에, 헌법재판소 출석 여부까지 자유롭게 결정하는 대통령의 방어권을 더 보장해야 한다는 건, 일부 위원이 정치적 목적으로 인권위를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문 지부장은 “인권위 역사에 부끄러움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며 “미래의 인권위 후배들이 ‘선배들은 대체 그때 뭐 했느냐’고 묻는 게 더 두려웠다”고 했다. 기자회견 이후 문 위원장을 알아보고 “용기 있는 행동을 했다” “고생한다”고 응원차 연락을 해오는 지인들이 그에겐 작은 힘이다.

인권위는 입법·사법·행정에 소속되지 않는 독립기구다. 문 지부장은 “우린 공무원 조직이지만, 대통령이 아닌 국제사회의 평가를 받는 곳”이라며 “국가인권기구를 이렇게 망가뜨린 사람은 나중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정권과 함께 왔다가 떠나는 이들과 달리, 계속 이곳에서 일해야 할 직원들은 인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문 지부장이 ‘국가인권위원회’라 쓰인 공무원증을 목에 걸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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