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양당의 독과점 정치는 견디기 힘들다. 한쪽은 반국가로부터 국가를, 다른 쪽은 반민주로부터 민주를 지키자 한다. 사실 윤석열을 지키고, 이재명을 지키자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 양당제라고 하는데, 진보도 보수도 아닌 것 같다. 그들을 위해 세상이 있는 듯 행동하는데 진보니 보수니 하는 말에 의미가 실릴 리 없다.
지금처럼 제3당의 독립적 기반이 약해진 때가 또 있었나 싶다. 4000여명의 지방의원 가운데 양당 소속이 98%나 되는데 자치나 분권, 다원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 공허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당이 너무 많이 가져서 문제라는 것이 아니다. 마치 한 나라 안에 두 국가가 대립하는 것처럼 혐오와 적대로 양분된 사회를 만들었다는 게 문제다.
같은 사람이 한쪽 편에서는 혐오의 대상이 되고 다른 편에서는 열광의 대상이 된다. 혐오가 곧 정체성이 된, 이상한 정당 정치다. 내란, 내전, 폭동도 이제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게 됐다. 8년 전 탄핵 때와 달리 이번에는 사태가 평화적으로 마무리될 것 같지 않다. 정치학자들은 이를 정치 양극화 때문이고, 거대 양당의 이념적 차이나 정책적 거리가 커져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동의할 수 없다.
정책적 차이나 이념적 거리라면 마땅히 커져야 한다. 대표의 범위가 다원화되고 합리적 경쟁의 기반이 넓어져야 민주주의는 좋아진다. 문제의 양극화 정치는 그런 정치가 아니다. 진보가 보수가 될 정도로 자유롭게 정책을 바꾸고 이념 위치를 옮겨서라도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 동시에 상대 당을 경멸하고 같은 당 안에서는 이견을 이적시하는 것, 문제의 본질은 거기에 있다.
혐오가 정체성 된 정당 정치
다원주의의 정치 언어는 사라진 지 오래다. 여야 똑같이 ‘국민 여러분’을 앞세운다. 서로를 ‘반국가 세력’으로 호명한다. 그런 식으로 뭐든지 가능한 게 양극화 정치다. 갑작스럽게 경제성장에 헌신하겠다고 한다. 소득이 발생해도 세금은 유예하거나 부과하지 않겠다고 한다. 자신을 한국의 트럼프로 소개한다. 트럼프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겠다고 한다. 이런 무도덕적 태연함이 양극화 정치다. 양극화 정치를 그만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정책적이고 이념적인 차이는 줄고 있는데 적대와 증오는 커지는 것, 적의 몰락과 나의 승리를 위해 상대의 정책까지 가져올 수 있는 것, 사회가 분열하든 말든 자신을 위한 것이면 뭐든 할 수 있는 것, 진영 내부적으로는 이견을 공격하고 억압하는 일당제의 심리를 자유롭게 드러내는 것, 양극화 정치는 이런 것이다.
서로 달라도 안전하고, 서로 달라야 풍부하다는 생각은 현대 민주주의에 와서 가장 큰 덕목이 되었다. 옳음이 하나라는 생각은 이제 민주주의가 아니다. 국교를 정하거나, 일당제 당-국가 체제를 만드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한때 총화단결과 총력전을 앞세웠던 전체주의 국가들이 강해 보였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밀렸으나 결국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는 느린 민주주의 국가들이었다. 다원 민주주의 국가들이었다. 자유, 평등, 평화, 안전, 건강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에서도 다당제 민주주의 국가들이 일당제 국가보다 훨씬 나았다.
이견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생명 원리다. 적대와 대립, 갈등을 공존 가능한 이견으로 전환하는 실력에 비례해 민주주의는 풍요로워진다. 제3의 의견이 존중되어야 생각이 넓어진다. 이견이 시민권을 갖게 된 덕분에 ‘타협’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바람직한 행동 규범이 될 수 있었다. 과거처럼 ‘도덕적 타락’이나 ‘원칙으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중간 정도의 진보’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교섭, 중재, 협상, 조정 등의 집단행동에도 민주적 가치가 부여된 것 역시, 이견은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선용의 재료가 되어야 한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다른 목소리 억압해선 안 돼
다른 것이 싫어지면, 걱정해야 한다. 선호의 다원성 대신 혐오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면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게 된다. 찬반 두 의견만 표출될 수 있는 민주주의는 위험하다. 적을 이롭게 한다며 이견을 억압하는 민주주의는, 가야 할 길이 아니다. 공포를 동원하고 두려움을 부과해 다른 생각을 못하게 하는 정당은 폭력 정당이지 민주 정당이 아니다.
지금 국면에서 가장 고통받는 것은 제대로 된 제3정당을 꿈꾸는 진보 세력이다. 그들이 조금만 다른 목소리를 낼까 봐 조바심 내고 그럴 때마다 그들을 ‘내란동조 세력’이라 겁박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의 여야는 과거지향적이다. 진즉에 넘어섰어야 할 낡은 과제에 그들은 몰두해 있다. 우리 민주주의가 어려움을 딛고 성숙해진다면, 찬란한 미래는 지금과 다른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만들어갈 것이다. 다른 목소리를 억압하려 들지 마라. 의견의 다양성 속에서 승리할 때만 민주주의는 전진한다. 그런 민주주의가 진보다.

박상훈 정치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