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화나 파시즘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서울서부지법 폭동이 남긴 상흔이 크다. 폭력을 일상의 수단으로 삼고 조장하는 이들을 어떤 세력으로 규정하지 말자는 목소리도 있다. 그들을 정체화하고 호명하는 순간 공론장의 일부로 공고화될 거란 우려다. 국회에 결코 등장해선 안 되었던 ‘백골단’처럼 이들을 공적 무대에서 비가시화하는 것이다. 나아가 극단주의자들을 합리적 보수와 분리해야 한다고도 한다. 이는 보편적 합의를 중심으로 연합을 형성해 그들을 소수파로 낙오시키는 전략이다. 이러한 구상들은 대체로 현 시기 사회운동의 역할과 맞닿아 있다. 어떤 집단을 대상으로 누구와 연합해 무엇을 이룰 것인가.
여전히 여당을 지지하는 다수의 시민이 있다. 하지만 그중에는 탄핵에 찬성하는 이들이 있다. 또한 탄핵에는 반대하지만 윤석열을 지지하지 않고, 서부지법 폭동에 단호히 반대하는 시민들도 있다.
역시나 이들 모두가 선거가 불공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당파적 이해에 따라 선관위, 헌재를 부정하는 이들 외에도 그동안 쌓여온 정치적 양극화나 사법화된 정치를 겪으며 공적 기관에 대해 강한 긍정도 강한 부정도 하지 않는 시민들도 있다. 양 끝을 기준으로 그 사이에는 다양한 정치적 의사를 가진 광범위한 스펙트럼의 시민이 있다.
우리 사회가 계엄, 폭동, 선거 부정, 헌재, 탄핵 등을 두고 두 쪽으로 쪼개져 결판을 내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입장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더욱이 선명하게 정렬된 양극단 사이 공간(중도)에는 국민의 절반 정도가 있다(강원택). 그들 모두를 ‘내란 세력’이라 매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운동이 앞으로 누구와 만날지는 사뭇 명확해 보인다. 특정 입장으로 강하게 정렬하지는 않지만 보편적 합의를 신뢰하는 거대한 중간지대의 시민들이다.
강렬한 구호나 청산·척결의 언어는 양쪽 끝에 자리한 시민들을 불러내는 데엔 적합하지만 이들에게 가닿기엔 역부족이다. 헌정 부정 세력을 단호하게 단죄하는 것은 중요하다. 게다가 기존의 우리 정치와 운동은 적대의 동원을 통한 단죄에 능숙하다. 그러나 단죄가 어떤 시민들을 극우로까지 퇴행하게 만든 적대의 토양을 바꿔낼 수는 없다. 운동이 본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현 위기의 종식과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꿈꾸며 광장에 나서는 것이라면 우리에겐 긍정의 언어, 연결의 언어가 더 많이 필요하다.
승자독식의 현 정치 질서에서는 상대를 제거하기 위해 정파적 이해를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원한의 정치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 질서에서는 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정파를 가리지 않고 폭력도, 민주주의 퇴행도 용인될 수 있다. 운동이 긍정의 언어를 통해 중간의 시민들까지 연결하여 이뤄내야 할 핵심은 바로 이 반복의 종식일 것이다.

김건우 참여연대 정책기획국 선임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