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정폭력 피해 여성이 사망 전 수차례 신고했는데도 제대로 대응하지 않은 경찰에게 내린 징계 처분이 정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가정폭력이 사적이고 반복적이기 때문에 징후가 있을 때 국가가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시했다.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신숙희 대법관)는 경찰공무원 A씨가 경기도북부 경찰청장을 상대로 제기한 불문경고 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단한 원심판결을 지난달 23일 확정했다.
고양경찰서 소속 한 파출소에 근무하던 A씨는 2021년 8월 ‘동거남과 시비가 있다’는 신고를 받았다. A씨는 현장에 출동했으나 신고 여성 B씨 몸에 상처가 나 있거나 기물이 파손된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B씨는 이후에도 ‘동거남이 다시 왔다’ ‘동거남을 왜 데려가지 않느냐’며 약 5시간 동안 총 14차례 파출소에 신고했다. A씨는 현장에 총 3차례 출동했지만 가정폭력이 있다고 보지 않았다. A씨는 동거남에게 “문 열어달라고 하지 말라. 술이 깨면 들어가라”고 주의만 주고 추가 정보는 수집하지 않았다. 또 동료 경찰이 112시스템에 사건 종별코드를 ‘가정폭력’이 아닌 ‘시비’로 입력했는데도 이를 정정하지 않았고, 가정폭력 사건 위험성 조사표도 작성하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됐다. B씨는 신고 당일 동거남의 폭행으로 사망했다.
경찰청은 A씨에게 직무 태만을 사유로 견책 처분을 내렸다. A씨는 이에 불복해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심사를 청구했고, 소청심사위는 징계를 견책에서 공식 기록이 남지 않는 불문경고로 변경했다. 그리나 A씨는 이마저도 취소해야 한다며 경찰청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A씨 측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위험성 조사표를 작성하지 않거나 112신고 종별코드를 변경하지 않은 것이 B씨 사망의 주요 원인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 사건 당시 상황을 고려했을 때 “A씨가 장차 가정폭력이 발생할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2심은 1심 판단을 뒤집었다. 재판부는 “A씨가 짧은 시간 동안 살펴본 후 물리적·신체적 폭력이 없었다고 단정한 나머지 그 밖의 가정폭력 여부에 대해 적극적 조사에 나아가지 않은 것은 직무의 태만 내지 성실의무 위반에 충분히 포섭될 수 있다”고 했다. 또 “가정폭력은 단순히 신체적 폭력행위에만 국한되지 않고 가정폭력 피해자는 공포와 불안감으로 피해 사실을 진술하는 데 소극적인 경우가 많은 만큼 피해자의 진술에만 의존하면 안 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A씨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 판단을 유지했다. 우선 대법원은 가정폭력에 대해 “매우 사적이고 은밀한 성격을 띠고 있어 잘 노출되지 않는 특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며 “가정폭력의 징후가 발견된 초기에 국가의 적절한 대응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그에 따른 피해는 점차 심각해질 위험이 있다”는 점을 명시했다. 그러면서 “A씨는 피해자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를 강구하는 데에도 소홀했고, 종별 코드를 변경하지 않아 적절한 후속조치를 취할 기회를 놓쳤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