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한 연대, 단단한 민주주의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지난주 재난인권교육을 주제로 하는 토론회가 있었다. ‘재난’은 오래 쌓인 문제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시간이다. 어쩔 수 없었다거나 몇몇 문제만 교정하면 된다는 말들은 결국 ‘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탄식을 반복하게 만든다. 토론이 가벼울 수 없었다. 그런데 뜬금없게도 영혼이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윤석열을 생각하지 않는 두 시간, 탄핵 가결 이후 두 달 남짓 누려보지 못한 호사였다.

탄핵심판이 사회를 더 혼탁하게 만드는 시간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전례를 깨고 출석한 윤석열은 끝없는 궤변과 거짓말을 늘어놓고, 여당 정치인들은 헌법재판소에 흠집을 내려는 어지러운 말들을 쏟아냈다. 윤석열이 대통령일 수 없다는 상식을 뒤집을 만한 사실과 주장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머지않아 반가운 소식은 들려올 텐데 기분이 개운할 수 없었다. 선거도, 의회도, 사법부도 부정하는 사람들. 인권의 기초를 허무는 극단주의를 설파하고 물리적 폭력도 서슴지 않는 이 사람들의 세력화는 또 다른 성격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또 다른 위기가 잉태되고 있다는 사실도 어지러웠다. 정부와 국회가 합심해 추진하는 반도체 산업 특별 지원이 그것이다. 반도체 수출이 늘어도 내수 경기 진작 효과가 없다는 지표가 쌓여 있고 미·중 패권 경쟁의 한복판이라 전망마저 불투명한데 특정 산업에 재정을 비롯해 자원을 몰아주는 현대판 플랜테이션에 사회가 끌려들어간다.

강원도와 경기도의 물을 탕진하고 동해안과 서남해안에서 전력을 끌어와 기업에 바치겠다는 계획이 현실화됐을 때 파괴될 삶과 생태의 위기는 명백하다.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화학물질과 강요된 초과노동은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것을 넘어, 땅과 물을 오염시키고 다른 산업의 노동자들까지 과로에 시달리게 할 것이다. 공공의 것인 물과 바람과 땅, 지켜져야 할 노동의 존엄과 권리가 식민화되는 결정이 민주주의라는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는 현실. 내란 세력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이 반도체특별법이라 상상하면 벌써부터 체한 기분이다.

오래 쌓인 문제들은 한꺼번에 등장하지만 한꺼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하고 무엇이든 해보지만 충분한지 자신이 없어진다. 재난인권교육 토론에서도 묘책은 없었다. 하지만 재난의 시간을 함께 헤쳐나갈 사람들을 만났다. 재난을 비켜서는 대신 정면으로 마주한 사람들은 변화의 씨앗을 찾아내고 만다. 맑은 기분은 윤석열을 잠시 잊어 생긴 여유가 아니었다. 세상이 아무리 흐려도 무엇을 보아야 할지 잊지 않으면 길을 찾게 된다. 누구와 함께 그 길을 가는지 기억하면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실천이 더 많아진다. 우리의 목소리로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의 삶과 민주주의를 연결하는 풀뿌리 공론장이 더욱 많아져야 할 때다.

풀뿌리 공론장은 극우 세력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지킬 저지선이다. 차별과 폭력을 선동하며 ‘사회’ 자체를 의심하게 하는 이들에 대항하는 근본적인 길은 ‘우리’가 더욱 강해져 ‘사회’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 증오의 대상으로 지목당할 때 모두를 향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동료들을 얻을수록 저들의 악다구니는 힘을 잃을 것이다. 풀뿌리 공론장은 다른 미래를 열어가는 출발선이다. 위기는 어떻게 자라나는가, 우리는 무엇을 바꿀 것인가. 길을 찾아낼 수 있다. 위기의 한가운데를 살아왔고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우리의 돌봄과 연대를 방해했는지, 평등의 조건은 어떻게 만들어갈지, 우리의 삶에 실마리가 있다.

광장에서, 집회와 행진에서 만나온 시간이 동네방네 일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자리들을 만들자. 얼굴과 목소리를 알아가고 서로의 삶을 배워가며 함께 살아갈 든든한 연대의 전선을 만들자. 느리지만 단단하게, 아래로부터 차곡차곡, 다른 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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