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 불교 발전을 위해 필수적”···비구니 있었기에 1700년 불교 이어져

이영경 기자
비구니 1700년 역사를 정리한 책 <역사 속 한국 비구니>를 기획한 수경스님이 17일 서울 강남구 전국비구니회관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비구니 1700년 역사를 정리한 책 <역사 속 한국 비구니>를 기획한 수경스님이 17일 서울 강남구 전국비구니회관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조선시대는 숭유억불의 암흑기였습니다. 비구 스님들의 활동이 제약받자 왕이나 귀족의 부인이 출가해 절을 짓고 백성들에게 불교를 전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시기에는 나라가 어려웠던 만큼 불교 또한 암울한 시대였죠. 이 기간 비구니 스님들의 역할이 있었기에 승가의 역사가 끊이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한국 불교의 역사는 1700년. 비구니의 역사 또한 불교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 삼국시대 신라의 첫 출가자는 여성인 사씨 스님이었다. 일제강점기 국채보상운동과 독립운동에도 비구니 스님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승단의 국채보상운동에 가장 먼저 참여한 이들은 비구가 아닌 비구니 스님들이었다. 1907년 3월6일자 황성신문에 여승들의 기부 내용이 가장 먼저 보도되기도 했다.

한국비구니승가연구소의 자료 수집과 연구가 없었다면 이같은 사실은 잊혔을 것이다. “기록이 없는 역사는 없는 역사와 같다”는 생각으로 한국비구니승가연구소가 그동안 거의 드러나지 않았던 한국 비구니 역사를 정리한 이유다. 연구소는 <삼국유사> 등 40여종이 넘는 고문헌과 비구니 스님들의 구술을 통해 1700년 비구니사를 정리한 <역사 속 한국비구니>(민족사)를 펴냈다. 이 작업을 기획한 수경 스님을 지난 17일 서울 강남구 전국비구니회관에서 만났다.

독립운동을 도왔던 만공 스님과 비구니 제자들. 1946년 1월16일 광복을 기념하여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비구니승가연구소 제공

독립운동을 도왔던 만공 스님과 비구니 제자들. 1946년 1월16일 광복을 기념하여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비구니승가연구소 제공

전국비구니회관은 한국 비구니 역사의 주요한 결실 중 하나다. 1968년 최초로 전국 규모의 비구니 조직 우담바라회가 만들어지고, 1980년 전국비구니회(현 회장 광용 스님)가 결성됐다. 교계 전반에서 여성 출가자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2003년 전국비구니회관이 건립되면서 비구니들을 위한 교육·수행·포교 공간이 만들어졌다.

“오래된 한국 불교 역사에 비해 비구니 관련 자료나 책은 거의 없습니다. 비구니들조차 윗대의 선배에 대해 잘 알지 못했죠. 승가는 비구와 비구니의 두 축으로 이뤄져 있지만 종단과 관련된 일에서는 비구 스님들의 활동이 많았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이 자신들이 한 일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도 소극적이었죠.”

역사적 자료 수집에는 본각 스님의 역할이 컸다. 1999년 한국비구니연구소를 설립하고 역대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했다. 전국의 비구니 스님을 찾아다니며 녹취를 했다. “왜 굳이 상(相)을 세우려 하느냐”며 인터뷰를 거부하고 혼내는 스님들이 많았지만, 어렵게 녹취한 자료를 풀어 정리하며 글로 옮겼다. 본각 스님이 2019년 제12대 전국비구니회장에 당선되면서 수경 스님이 비구니승가연구소장이 돼 비구니사 정리 작업이 본격화됐다. 수경 스님은 “더 늦기 전에 우리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었다. 몰랐던 비구니 역사를 알고 자긍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비구니의 역사는 한국 여성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출가자의 사회이기 때문에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한국 여성사의 지평을 넓힌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여 고란사 대웅전 뒷벽에 그려진 비구니 구족계를 받기 위해 백제로 건너오는 일본의 여성출가자 상상도. 민족사 제공

부여 고란사 대웅전 뒷벽에 그려진 비구니 구족계를 받기 위해 백제로 건너오는 일본의 여성출가자 상상도. 민족사 제공

수경 스님에게 한국의 대표적인 비구니 스님이 누구냐고 물었다. 수경 스님은 “한두 분을 꼽을 수는 없다. 각 시대마다 훌륭한 스님들이 있다”고 말했다. 수경 스님은 신라 최초의 출가자 사씨 스님부터 조선시대 세종의 형이었던 효령대군과 함께 ‘생불’이라 불린 사실 스님까지 역사상 걸출한 비구니들을 꼽았다.

1950년대 벌어진 불교정화운동은 비구니 승가가 자신들의 정체성에 눈뜨고 불교계에 만연한 성차별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며 조직화하는 주요한 계기가 됐다. 일제시대 조선 불교를 일본화하려는 정책으로 대처승(결혼한 승려)이 크게 늘면서 1954~1962년 비구승을 중심으로 불교계 내 자정운동이 벌어졌다. 비구니 스님들의 참여가 활발했는데, 1954년 12월 개최된 전국 비구·비구니대회에는 수백명의 비구니가 참여해 비구의 두 배를 넘었다. 치안국에 입건된 비구니 수도 441명으로 비구 366명보다 많았다.

비구니의 공로를 인정해 1954년 임시중앙종회에서 종회의원 50명 가운데 비구니 10명이 종회의원으로 선출됐다. 교구 본사 주지로 비구니 스님들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같은 조치는 임시적이었고, 비구니가 힘겹게 재건한 사찰에 비구를 주지 스님으로 보내는 일이 잦았다. 이후 비구니 조직화와 함께 참종권 확대에 대한 요구도 높아졌지만 개선되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 81명의 중앙종회 의원 가운데 10명만 비구니 몫이다.

비구니 1700년 역사를 정리한 책 <역사 속 한국비구니>를 기획한 수경스님이 17일 서울 강남구 전국비구니회관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비구니 1700년 역사를 정리한 책 <역사 속 한국비구니>를 기획한 수경스님이 17일 서울 강남구 전국비구니회관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비구와 비구니 비율이 50대 50인데 중앙종회의원 81명 중 10명만 비구니 스님이니 구성원 비율이 불평등하긴 합니다. 종무 행정에서도 비구 중심적인 면이 있고, 종법에서도 비구로 자격이 한정된 부분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총무원장 자격을 ‘비구’로 한정하고 있죠.”

수경 스님은 “출가자가 급감해 종단의 존속이 우려되는 가운데, 비구니 스님들이 역량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활동의 장을 열어줘야 한다. 비구니를 리더로 성장시킬 수 있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출가자 성평등과 참종권 확대의 길은 회피할 수 없는 문제”라며 “비구니승단의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불교계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 변화가 필요하다”라고 덧붙였다.

수경 스님에게 현 시대에 필요한 불교의 가르침이 뭔지 물었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해 출가했지만, 출가하고 나서 깨달은 건 ‘현재가 중요하다’는 사실이었어요. 내가 최선을 다해 이때를 살면 그게 곧 미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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