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정부 시절 탈북한 어민들을 강제로 북송한 혐의로 기소된 서훈 전 국정원장·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19일 1심 법원에서 선고 유예형을 선고받고 서울중앙지방법원 청사 앞에서 입장발표를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귀순 의사를 밝힌 탈북 어민을 강제로 북한으로 송환한 사건에 관여한 정의용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등 문재인 정부 외교·안보 고위 인사들이 19일 1심에서 징역형의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이들이 어민을 강제로 북송한 것이 신체의 자유와 거주 이전의 자유, 재판받을 권리의 행사를 방해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남북 분단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서 법과 현실이 괴리돼 있는데도 이번과 같은 사안에 적용할 법률, 지침 등이 전혀 마련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법원은 이 사건 수사가 윤석열 정부의 ‘사주’로 진행됐다고도 밝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재판장 허경무)는 이날 국가정보원법 위반,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정 전 실장과 서훈 전 국정원장에게 각각 징역 10개월의 선고를 유예했다. 함께 기소된 노영민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에게는 각각 징역 6개월의 선고를 유예했다. 선고유예는 유죄를 인정하지만 형의 선고를 미뤘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면소된 것으로 본다.
정 전 실장 등은 2019년 11월2일 동해상에서 탈북 어민 2명을 나포한 지 이틀 만에 노 전 실장 주재로 청와대 대책 회의를 열어 진행 중이던 합동조사를 종료하고, 북송을 결정했다. 이들이 동료 선원 16명을 살해하는 등 중대 범죄를 저질러 보호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탈북 어민들은 나포 후 5일 만인 11월7일 북한 당국에 넘겨졌다.
이후 서울중앙지검은 한 보수 성향 시민단체가 정 전 실장 등을 고발하자 수사한 뒤 2021년 11월 각하 처분했다. 검찰은 당시 “정 전 실장 등이 직무 권한에 속하는 사항에 대해 법령에 따라 직무를 집행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자 검찰은 태도를 바꿨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한 달 만에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검토 중이라고 발표했고, 곧이어 국정원의 고발 형식으로 검찰 재수사가 시작됐다. 검찰은 국정원, 대통령기록관 등에 대한 압수수색과 관계자 소환조사 끝에 2023년 2월 정 전 실장 등을 불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겼다.
법원은 북송 어민들이 대한민국 국민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헌법에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조항이 있고, 이에 따라 북한 주민 역시 일반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에 포함된다고 봐야 한다”며 “이들의 의사에 반해 북송한 것은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법률에 의한 재판 받을 권리의 행사를 방해한 것”이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자백만으로 북송을 결정하고, 나포 시점부터 불과 5일 만에 이를 집행했다”며 “이를 정당화하면 수사와 재판을 통해 사회 안전을 실현한다는 형사사법제도가 무용한 것이 된다”고 했다.
다만 재판부는 북송 어민들이 동료 선원 등 16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실 등을 양형에 참작했다고 밝혔다. 또한 재판부는 “분단 이후 이런 사건에 적용할 어떤 법률이나 지침도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일을 담당한 사람만을 처벌하는 게 옳은지 의문이 든다”며 “선고를 유예하는 게 가장 합리적으로 내릴 수 있는 양형”이라고 밝혔다. 이번 사건이 헌법상 영토·국민에 대한 조항 등 ‘법적 모순과 공백’ 탓이 크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특히 재판부는 이 사건 수사가 사실상 윤 대통령의 사실상 공개 지시에 따라 이뤄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재판부는 “수사 개시와 기소 과정에서 대통령이 직접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해 언론에 보도되고 대통령실이 그와 관련된 언론 브리핑 등을 수행”했다며 “검사는 국정원의 고발에 의해 시작된 사건임에도 고발인인 국정원이 주는 자료를 거의 그대로 받아 증거로 사용했다”고 밝혔다.
정 전 실장 등 변호인들은 선고 이후 입장문을 내고 “검찰이 이미 불기소 처분한 사건을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 검찰이 무리하게 기소했다”며 “이전 정부가 국익과 국민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내린 정책적 판단을 이념적 잣대로 접근했다”고 말했다. 검찰은 “범행을 일체 부인하는 피고인들에게 형의 선고를 유예한 것이어서 수긍하기 어렵다”며 “판결문을 상세히 검토한 후 항소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