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인근에서 ‘더 이상 성평등 후퇴는 없다’는 손팻말을 들고 윤석열파면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정효진 기자
‘노 민스 노 룰’은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표했는데도 성관계가 이뤄졌다면 성범죄로 간주해야 한다는 규범이다. 더 나아가 ‘예스 민스 예스 룰’은 상대방의 ‘동의’가 있어야만 합의된 성관계로 본다. 미국 일부 주와 캐나다·유럽 등에선 이 룰을 성폭력 판단의 핵심 기준으로 보고 있다.
국내에선 2018년 안희정 전 충남지사 1심 무죄 판결을 계기로 ‘예스 민스 예스’ 원칙을 적용해 성범죄를 처벌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해졌다. 비록 ‘9시간의 촌극’으로 끝나긴 했지만, 여성가족부도 2023년 1월 ‘비동의강간죄’를 추진하려고 하긴 했다.
당시 법무부·여당 반대에 하루도 안 돼 정책을 뒤집었는데, 그 배경에 대통령실이 있었단 사실이 19일 새롭게 드러났다. 김종미 전 여가부 여성정책국장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 법 추진과 관련해서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실의 감찰을 받았다고 밝혔다. 김 전 국장은 서면경고, 담당 과장은 서면주의 조치를 받았다고 한다. ‘관리 및 검토 소홀’ 등 이해 못할 이유를 들어서였다. 여가부를 폐지하겠다는 대통령 윤석열의 기류를 반영한 것인데, 있어서는 안 되는 행태이다.
형법상 강간죄는 저항이 곤란할 정도로 폭행·협박이 있어야만 인정된다. 2022년 ‘성폭력 안전실태조사’를 보면 성추행을 당한 여성 중 폭행·협박이 있었다고 답한 비율은 10%가 채 안 된다. 이런 이유로 여성단체들은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이나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대체하는 ‘비동의강간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무고한 남성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무고가 성폭력 범죄에만 있는 것은 아닐 텐데, 무고를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한국 사회가 성범죄에 지나치게 허용적이란 뜻일 것이다.
성폭력을 개인의 불행으로 돌리며 방조하는 사회는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도 2018년 한국에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권고했다. 그러나 요지부동이다. 여가부를 폐지도 존치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둔 탓이 크다. 정부가 못하면 국회라도 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 ‘여성 인권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언제까지 안고 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