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창밖에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면서도 햇빛이 비친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다. 곧 인간은 거짓말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거짓말을 꾸며낼 뿐만 아니라 행동에 옮기기도 한다.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거짓을 말하고 행하는 능력, 바꿔 말해 사실을 부정할뿐더러 사실을 변화시키는 힘을 인간의 중요한 특성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능력이 폭력 수단을 가진 사람들에게 활용되면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뉴욕 뉴스쿨의 역사학자 페데리코 핀첼스타인은 <파시스트 거짓말의 역사>에서 거짓말을 새롭고도 체계적인 방식으로 활용한 강력한 정치적 전통이 있다고 주장한다. 파시즘이 그것이다. 파시즘은 거짓말을 전례 없는 규모와 수준에서 정치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전쟁과 내전, 학살 등 끔찍한 역사적 트라우마를 남겼다.
파시즘은 누가 봐도 거짓인 것을 진실로 둔갑시키는 정치적 곡예를 선보였다. 이탈리아 파시즘은 “무솔리니는 항상 옳다”는 말로 독재자의 망상과 허풍을 진리로 위장했다. 또한 독재자들은 자신들의 과실과 책임을 거짓말로 적들에게 떠넘기고는 했다. 스페인의 프랑코는 자신의 가장 큰 범죄인 게르니카 폭격이 적들의 소행이라고 태연히 덮어씌웠다. 과연 파시스트 독재자들은 자신들의 의도와 욕망을 상대방에 투영해 적들을 비난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독일의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사악한 계획으로 민주주의를 허물고 독재를 세우려 한다면서 공격했다.
거짓말은 집요하게 반복되면 진실로 여겨진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진실은 반복된 거짓말로 의심받기 일쑤다. 진실은 한낱 의견으로 치부되거나 거짓으로 추궁당한다. 의심이 쌓이면 사람들은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기 힘든 상황에 처한다. 진실과 거짓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상태야말로 파시즘이 번성하는 온상이다. 아렌트는 의미심장하게도 전체주의 지배의 이상적 신민은 확신에 찬 나치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 진실과 거짓을 더는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파시즘은 허구를 현실로 바꾸려고 했다. 무솔리니는 한편으로 용병 대장이자 평화의 천사, 만인의 연인으로, 다른 한편으로 카레이서이자 파일럿, 복서로 신화화되었고 거대한 선전 기계에서 찍어낸 이미지들이 현실에 무차별적으로 콜라주 되었다. 이처럼 신화를 만들고 현실을 조작하는 파시즘의 정치적 테크닉은 반유대주의에 이르러 미증유의 폭력적 도구가 됐다. 파시스트들은 유대인들을 더럽고 오염된 인종으로 낙인찍었고, 게토와 강제수용소에 불결과 질병이 만연하는 환경을 인위로 조성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파시스트가 자기의 거짓말을 스스로 믿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괴벨스는 자신에 대한 암살 사건을 날조하고서는 이를 일기에 사실처럼 기록해두었다고 한다. 이처럼 자신의 거짓말을 사실로 믿는 자기기만은 파시즘 고유의 특징일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파시스트들이 그들만의 극단적 세계관과 호전적 권력욕을 실천에 옮긴 그 무모함을 설명하기 힘들다.
최근 유럽과 미국, 또 우리나라에서 정치적 갈등이 첨예해지고 억견과 궤변이 난무하면서 진실과 거짓에 대한 건전한 감각을 마비시키고 진실을 말하려는 사람들을 위축시키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파시즘의 음습한 기운이 느껴지는 까닭이다.
물론 어제의 전체주의와 오늘의 민주주의를 단순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양자의 차이가 아니라 유사성이다. 권력과 신화, 거짓말을 한데 뭉쳐낸 그 유사성이 두렵다. 이렇듯 진실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한 언론학자의 조언이 인상적이다. 한 사람은 비가 온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다고 할 때, 우리가 할 일은 두 사람 말을 모두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다.

장문석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