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이라는 시금석

한윤정 전환연구자

시민사회의 개헌 논의가 활발하다. 지난달 31일 헌정회에서 열린 헌법개정 추진 단체 간담회에는 20곳이 참여했다. 비상계엄 상황은 물론 경제·기후환경·안보 등 복합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헌법개정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함께하는 단체들이다. 대통령과 의회의 권한 분산, 지역대표형 상원제를 통한 지방분권, 헌법개정 국민발안제를 주요 의제로 설정하고 탄핵이 인용되면 대선과 동시에, 탄핵이 기각되더라도 2026년 6월 지방선거와 함께 개헌 국민투표를 하자는 데 동의한 8곳(대한민국헌정회, 대화문화아카데미 등)이 먼저 ‘헌법개정추진 연석회의’를 구성했다. 다른 20여개 시민단체도 오는 24일 ‘국민주도상생개헌본부’를 출범시켜 1000인 선언을 시작으로 개헌운동에 나선다.

대통령 윤석열을 핀셋으로 뽑아낸다고 정치가 좋아지는 건 아닐 것이란 공감대가 넓다. 조기 대선이 예상되는 가운데 가장 유력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역시 제왕적 대통령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깊다. 국가가 수렁에 빠진 지금, 40년 만의 개헌을 이뤄 국가 공동체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기대가 높다. 국회가 헌법에 따라 비상계엄조치를 해제하고 헌법재판소가 탄핵 심판을 진행하면서, 헌재 결정을 훼손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헌법의 존재감은 한껏 고양됐다. 헌법 읽기, 헌법 필사, 헌법개정안 토론회 등 시민들의 다양한 움직임에는 헌법을 제대로 알면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기대가 보인다.

헌법은 한 국가의 실체이자 상징이지만 완벽한 헌법은 없다. 국가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와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에 그런 합의를 담아 계속 수정이 이뤄진다. 헌법에 따라 국가가 작동하는 한편 국가의 현실이 사후적으로 헌법에 반영된다. 1987년 9차 개정을 마지막으로 헌법을 바꾸지 못한 한국 사회는 동맥경화에 걸렸다. 그사이 한국은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이 되었고 성장보다는 분배, 복지, 지속 가능성이 중요해졌다. 중앙집중, 지방소멸, 인구절벽, 생명경시 등 많은 문제 역시 전체사회의 가치를 바꾸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필요에 따라 관련 법률이 제·개정되기에 헌법에 모든 걸 담아야 하는 건 아니다. 헌법이 바뀐다고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헌법이 주는 울림, 국민을 통합하는 힘이 중요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제1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제10조) 헌법 조항에는 범접하기 힘든 위엄이 깃들어 있다. 정치의 실패는 언어의 타락이기에 지금 더욱 웅장한 헌법의 언어가 필요하다.

시민과 시민사회가 헌법에 담을 새로운 가치를 고심하고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권력 구조를 모색하는 동안, 정작 개헌을 추진해야 하는 국회는 이 문제에 진지하지 않다. ‘우리가 해봐서 아는데 어차피 안 되니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코너에 몰린 국민의힘은 분권형 개헌을 제안하면서 개헌 특위까지 만들었으나 헌법을 위배한 계엄 당사자를 옹호하면서 개헌을 말하는 게 설득력이 없다. 민주당은 비주류 후보들이 개인 의견으로 개헌을 언급할 뿐 당 차원에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더 개헌을 원한다는 설문조사 결과와 다르다. 공론화할 책임이 있는 언론도 크게 관심이 없다. 시시각각 현실을 좇는 뉴스 속에서 개헌처럼 큰 주제는 설 자리를 잃는다. 개헌논의는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인데 논의가 뜨겁다기보다 뱉지도 삼키지도 못한다.

세상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차이를 좁힐 때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간다. 개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개헌에 담고 싶은 내용은 정당마다, 시민사회 세력마다 다를 텐데 대개 동의하는 내용으로 좁혀야 한다. 시간이 부족해서 조기 대선이 이뤄질 때 개헌투표를 하지 못한다면 개헌을 위한 절차법이라도 만들자는 게 최소한의 목표가 될 수 있다. 개헌을 가능케 하는 역량을 키우려면 헌법개정추진연석회의, 국민주도상생개헌본부 등의 활동에 관심을 두고 힘을 모아주는 게 우선이다. 물론 여당과 야당이 지루한 핑퐁 게임을 끝내고 개헌을 통한 국민통합에 나선다면, 그러기 위해 현재 공을 쥔 이재명 대표가 골문을 향해 나아간다면 역량은 단번에 커진다. 비현실적인 꿈일 수 있으나 개헌이 탄핵과 청산을 거듭해온 지난 20년을 뒤로하고 새로운 국가 공동체를 만드는 시금석이 될 것이란 생각은 분명하다.

한윤정 전환연구자

한윤정 전환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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