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규의 외교만사 外交萬思]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는 법](https://img.khan.co.kr/news/2025/02/20/l_2025022101000592900063961.jpg)
격변의 시대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외정책은 기존 국제정치 구조와 관념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19세기 말 약육강식에 입각한 강대국 국제정치는 제국주의적인 팽창과 충돌을 겪으면서 세계적인 규모의 1차·2차 대전으로 귀결된 바 있다. 전승국들은 이 참화의 재연을 방지하기 위해 유엔 질서를 수립하고, 영토와 주권의 존중을 가장 핵심적인 가치로 확립했다.
미국은 이 체제의 수호자이자 최대의 수혜자였다. 트럼프는 이 체제를 해체하고 있다.
과거 미국의 군사력은 압도적이었고, 미국의 민주주의 체제와 시장경제는 인류 진보의 종착점처럼 보였다. 미국의 달러는 세계의 기축통화로 인정받았다.
미국은 세계의 정치·경제적 안정을 위해 마치 중세시대의 신에 필적할 만한 권한을 부여받은 ‘새로운 중세’의 신과 같은 존재였다. 영토와 주권 체제의 수호자이기도 했다.
신이 부재한 세속적인 근대는 그 어느 시기보다 참혹한 전쟁터였고, 약소국들은 참화를 면치 못했다. 어느 누구도 정의와 도덕률을 규정할 수 없는 시대에는 전쟁의 승자가 정의였고 도덕이었다.
트럼프의 미국은 ‘새로운 중세’ 시대가 부여한 신의 권능을 스스로 내려놓고, 자신만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탐하는 ‘세속의 시대’라는 지옥의 문을 열고 있다.
트럼프가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 세계는 트럼프가 추구하는 최종 목표에 혼란스러워했다.
이익만 탐하는 야수로 돌변한 미국
그 목표가 1기 때 제기한 미국의 심각한 무역역조 현상을 교정하는 것이라면, 이는 수용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 미·중 패권 경쟁의 시기 미국의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면 각국은 순응, 타협, 헤징을 결합한 좌표를 설정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트럼프가 추구하는 것이 현 국제 질서의 본질적인 개조라면 이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각국은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릴 것이고, 군사적인 생존을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신 대신 미국 스스로가 사탄으로 변모한다면, 이 세상은 탐욕스럽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우크라이나의 이해와는 관계없이 미국과 러시아 간의 협상으로 결말지으려 하고 있다. 트럼프는 궁지에 몰린 우크라이나에 도움의 손길 대신 광물자원의 반을 요구하고 있다. 지정학·전략적으로 중요해진 그린란드에 대한 합병 가능성도 내비친다. 가자 주민들을 소개하고, 미국령으로 만들겠다고 한다. 기존 국제정치에 대한 관념과 구조는 이제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문제는 미국 대외정책의 이러한 변화가 트럼프 개인의 주장이나 일시적인 것이 아닐 개연성이 크다는 데 있다.
전후 국제정치에서 신의 권능을 부여받은 미국은 나태하고 방만했다. 자본을 향한 향연은 미국 내 금융자본의 득세, 이들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추구, 견제와 균형의 정치 붕괴, 지나친 자기중심적 낙관주의, 소수 엘리트 그룹에 집중된 권력의 사유화 현상으로 전이되었다.
그 결과 관용적이고 공화적인 미국의 영혼은 사라지고, 마치 두 개의 다른 세계가 미국 내에 존재하는 나라가 되었다. 동서부 해안지대와 남부·내륙 지역 간의 괴리, 엘리트 기득권층과 하층 노동계급의 괴리, 자유주의적 세계관과 기독 근본·토착주의의 괴리 등은 극심해졌다.
이처럼 내부 분열이 극심하고, 신으로서의 자신감을 상실한 미국은 두려움과 분노에 가득 차고 초조한 세속의 야수처럼 변모해간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국의 영토와 세력권 확장을 추구하던 19세기로의 퇴행이 엿보인다. 세계를 자신의 이상대로 변모시키겠다는 자신감을 상실했다. 대신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백인 우월 민족주의, 보수 정통 기독교적 세계관이 다시 미국의 정신세계를 뒤덮기 시작했다.
국제정치 무대는 미국, 중국, 러시아가 세력권을 재편하기 위해 벌이는 약육강식의 거대한 체스 게임으로 변모하고 있다. 거기에 인도, 서유럽, 글로벌 사우스의 국가군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혼돈과 사탄 세계의 망령이 스멀거리면서 올라온다.
관념보다 복합적·현실적 방책 필요
이러한 변화는 대한민국의 생존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가져다준다. 우리 역사상, 주변 강대국들 간의 세력전이나 패권 경쟁 시기 한반도는 단 한번도 파쇄국가화라는 불행을 비켜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혼돈의 시기 강대국들은 전면적인 충돌보다는 주변 약소국이나 동맹국들의 희생에 기반한 패권 경쟁을 선호한다. 현대의 과학과 산업 수준에서 강대국 간 정면승부는 강대국 자신들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같이 그 변방에 속한 국가는 강대국들에서 끊임없는 선택의 압박과 회유를 받게 된다. 동맹인 강대국의 전쟁에 연루되거나 동맹으로부터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항상 자리 잡고 있다. 상대방으로부터의 보복은 필연이 된다.
한국의 새로운 외교·안보·정치 지도자들은 트럼프가 창조한 이 시대전환이 미·중·러 간의 세력과 영토 확장을 추구하는 지정학 게임을 본격화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어느 강대국도 우리의 헌신과 봉사에 상을 주기보다는 가용할 수단으로 치부할 것이다. 가치가 없다고 하면 버려지는 세계이다.
이러한 시대의 생존법은 우선, 우리가 세속의 사악함이 넘치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는 것이다. 허울과 관념보다는 보다 복합적이고, 임시방편(modus vivendi)의 현실적인 방책들을 필요로 하는 세계다. 미국과 동맹을 중시하면서도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융통성 있게 잘 관리하려는 노력, 한반도 양국체제의 임시적 인정과 평화를 통한 궁극적 비핵화 방안의 수용, 핵무장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한반도 군사적 균형을 달성하려는 노력 등이 필요하다.
적실성 있는 대외정책은 아무리 불만스럽더라도 극단의 주장, 배제, 대립보다는 상호 존재를 인정하면서 국내정치를 안정시키려는 ‘임시방편’적인 노력과 정책들이 그 전제가 된다. 분열과 배제는 망국으로 가는 특급호이다.

김흥규 아주대 미중정책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