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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부서진 밤을 비추는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빛, 부서진 밤을 비추는
장벽 속에 몰아넣고 총알을 퍼붓는다

길이 사십, 폭 팔 킬로미터의 땅에 가두고

로켓과 미사일과 포탄을 밤낮으로 쏟아붓는다

하마스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하마스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

차라리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의 자식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무차별 폭격을 가한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살해한다

일곱살, 다섯살, 세살, 두살, 한살 …

아이들 다음에는 노인과 여자들이 피투성이로 누워 있다

하마스는 어디에 있는가!

이들만 유일하게 살아서 서서히 죽는 방식으로 또 죽인다

아우슈비츠보다 더 당당하게 더 공개적으로

아우슈비츠가 아우슈비츠를 만든다

지중해와 분리벽 사이 이백만 주민들에게 남쪽으로 사라지라고 한다

남쪽도 막히고 병원도 학교도 유치원도 모스크도 무너져 내린다

전기도 연료도 식수도 빵도 끊겨버린 암흑천지

시체 위에 시체가 쌓이는 거대한 콘크리트 피라미드

멀리서 날아오는 미사일이 부서진 밤을 비춘다

오직 죽이고 부수기 위해 빛들은 가자로 날아온다

- 시, ‘아우슈비츠-가자지구’, 박승민 시집 <해는 요즘도 아침에 뜨겠죠>


며칠 강풍 불고 날이 추워지면서 누군가 자꾸 내 방문을 두드리는 것만 같다. 문을 열자 천지사방에 흰 눈가루가 날리고 있었다. 무구하고 무고하게. 저 먼 곳에 잿가루가 날리는데, 왜 앞산의 나무들은 흰 눈을 맞고 있나. 얼어서 죽은 무함마드야, 태어난 지 사흘 만에 파묻힌 아가야. 미안해. 무고한 바라야 미안해.

2023년 가을 이후 날마다 세계는 목도해왔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을. “일곱살, 다섯살, 세살, 두살, 한살 …”, 숫자로만 전해지는 아이들의 죽음을. 거대한 감옥이었던 가자로부터 노골적인 학살지가 되어버린 참혹한 이름을. “전기도 연료도 식수도 빵도 끊겨버린 암흑천지” 속에서, 폭격 맞아 죽고 얼어 죽고 굶어서 죽은 “시체 위에 시체가 쌓이는 거대한 콘크리트 피라미드”를.

2024년 11월20일 아랍 위성 알자지라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 어린이는 1만7400여명이다. 그중 ‘바라’라는 이름의 무고한 아이는 71명, 행복이라는 뜻의 ‘파라’는 64명, 아름다움과 은총이라는 이름의 ‘가잘’은 41명, 행복을 불러오는 ‘사라’는 98명, 존귀함을 뜻하는 ‘아흐메드’는 439명, 예언자와 이름이 같은 ‘무함마드’는 935명이다. 이스라엘은 “길이 사십, 폭 팔 킬로미터의 땅에 가두고/ 로켓과 미사일과 포탄을 밤낮으로 쏟아”부었다. “하마스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하마스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

며칠 전 트럼프는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체포영장이 발부된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를 백악관에 초청하고, 일주일 후 폐허가 된 땅을 값어치 있는 다이아몬드에 비유하며 가자지구를 가질 것이라 선언했다. “오직 죽이고 부수기 위해” 달려드는 무기를 지원하고, 가자지구의 집단학살에 공모해왔던 미국 아니던가. 가자를 통째로 집어삼키겠다는 계엄령하의 포고문 같은 발언을 들으며 팔레스타인에서 만난 한 여인을 생각한다.

15년 전,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만난 만수르(만수라)는 승리라는 뜻을 지닌다고 했다. 1945년 이스라엘 점령군이 쳐들어오던 해, 갓 태어난 그이는 피란길에 올리브나무 아래 버려졌지만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좁긴 해도 그의 집은 아늑하고 우아하고 그가 손수 장만한 음식만큼이나 따스했다. 승리라는 이름과 달리 누천년 살아온 조국을 빼앗기고 전쟁의 참화 속에서 아버지와 남편을 잃었지만 존엄하고 인간적인 미소를 잃지 않던 그이는 살아남았을까. 낯선 이방인을 보기 위해 몰려든 선한 눈빛의 이웃들과 친척들은 무사할까. 오직 살리고 고귀해지기 위해 아픈 땅으로 날아갈 빛은 어디에 있는가.

김해자 시인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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