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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여행의 중간 지점에 있다”

카탈루냐 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자우메 카브레의 소설집 <겨울 여행>이 출간됐다. (C) LM Palomares

카탈루냐 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자우메 카브레의 소설집 <겨울 여행>이 출간됐다. (C) LM Palomares

겨울 여행 |

자우메 카브레 지음|권가람 옮김 |민음사|308쪽 |1만5000원

12월의 비 내리는 어느 날, 중년의 음악학자 졸탄 베셀레니는 가슴속 깊은 설렘을 간신히 억누르며 오스트리아 빈의 묘지를 찾는다. 이곳은 슈베르트, 모차르트, 베토벤 등 위대한 음악가들이 영면한 장소이자, 25년 전 연인 마르게리타와 재회를 약속한 곳이다. 운명처럼 사랑했으나 어쩔 수 없이 헤어졌던 그들의 마지막 약속이 오늘 이곳에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졸탄의 가슴은 요동친다.

졸탄과 마르게리타가 함께한 시간은 단 28일이었다. 그는 피아노를 배우던 스물여섯의 청년이었고, 마르게리타는 성악을 공부하기 위해 빈을 찾은 스물두 살의 음대 지망생이었다. 연주회에서 운명적으로 마주친 두 사람은 한눈에 서로에게 빠져들었고, 졸탄은 마르게리타와 보낸 시간을 “기쁨이 바로 옆에 있었”고, “피아노를 연습하고 남은 모든 에너지는 넘치는 행복에 숨 막혀 죽지 않도록 호흡을 고르는 데 써야 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사랑이 가장 뜨겁던 순간, 마르게리타는 갑작스럽게 이별을 고한다. 사실 그녀는 성악을 배우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고향 베네치아에서 예정된 결혼을 앞두고 확신이 서지 않아 빈으로 도피한 상태였다. 졸탄은 그녀를 붙잡고 애원하지만, 마르게리타는 결국 떠난다. 단, 25년 후 같은 장소에서 다시 만나자는 졸탄의 소원만을 받아들인 채.

카탈루냐 문학(스페인 자치주 카탈루냐 지역에서 발전한 문학)의 거장 자우메 카브레의 소설집 <겨울 여행>이 출간됐다. 표제작은 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과거에 사로잡혀 그리움에 잠식된 채 살아가는 사람의 외로움과 회한을 그려낸 작품이다.

졸탄은 마르게리타와 이별한 후 안나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지만, 그 관계에는 언제나 무언가 빠져 있었다. “그의 집착하는 눈빛은 그녀의 어깨 위를 스쳐 지나, 마르게리타에 대한 기억에만 정확히 꽂혔고, 그가 마르게리타를 도무지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던 것은 28일간의 숨 막히는 사랑을 통해서만 그녀가 각인됐기 때문이다.” 안나는 “당신 얼굴엔 언제나 슬픔이 가득해”라고 하면서도 이유를 캐묻지 않았고,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다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졸탄은 자문한다. “어쩌면 집 안에 부재했던 웃음이 안나의 머릿속 울혈을 만들어낸 건 아닐지.”

마르게리타의 기억에만 사로잡혀 산 졸탄이 피아노 연주자의 길을 접고 고문서를 연구하는 음악학자가 된 것도 어쩌면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망각이라는 것이 너무나 버거웠던 그에게는, 그저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낙엽이 지는지 해가 뜨는지를 알려 주는 창가에 앉아, 시간이 가기만을 안절부절 기다리며, 타인의 기억 속에서 잊힌 것들을 구제하는 일이 더 맞았다.”

비로소 25년이 지나, 졸탄은 약속 장소인 묘지를 찾아가며, 자신을 옭아맸던 그리움과 회한의 여행이 마침내 끝날 수도 있다는 희망에 부푼다. “알로이스 리히텐슈타인의 무덤까지 도달하자, 그의 심장은 터질 것 같았다. 달리기를 해서가 아니라, 절망의 터널을 지나 매우 길었던 여행의 도착점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희미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게리타와의 재회를 기대하는 순간, 그는 또 한 번의 이별을 맞닥뜨리며 깨닫는다. “빈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인생은 하나의 경로도 목적지도 아닌 여행이며, 우리가 사라질 때는 그 위치가 어디든 우리는 언제나 여행의 중간 지점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겨울 여행>. 민음사

<겨울 여행>. 민음사

소설집 <겨울 여행>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인간의 계획과 무관하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삶의 아이러니를 다루며, 대부분이 반전을 통해 성찰과 여운을 남긴다. 아내와 사별하고 나서야 자식들이 자신의 핏줄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는 ‘유언장’,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극심한 무대 공포증에 시달리다 슈베르트의 환영을 보며 무너지는 ‘사후 작품’, 오랜 시간 동료들과 탈옥을 계획한 죄수가 탈옥 당일 뜻밖의 사건으로 홀로 감옥에 남게 되는 ‘손 안의 희망’ 등, 작가는 예측 불가능한 반전을 통해 삶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으며, 한순간의 우연한 사건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서사의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을 제멋대로 보여 준 채, 아닌 척 모호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속이려 한다. (‘손 안의 희망’ 중)” 그러나 운명에 속절없이 당하고 마는 인간의 나약함은 단순한 결점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다운 면모임도 작가는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작품은 설령 모든 길이 허사가 되더라도, 그 여정 자체가 삶의 일부이며, 우리는 끊임없이 나아가는 여행자임을 자각하게 한다. ‘겨울 여행’에서 졸탄은 슈베르트의 묘지 앞에서 마르게리타가 부르는 가곡 ‘겨울 여행’의 한 구절을 들으며 깊은 감동에 눈물을 흘린다. “이방인으로 여기에 왔다가, 이방인으로 여기를 떠난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인간의 불완전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모두에게 조용한 찬사를 보낸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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