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이 19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진행한 언론 인터뷰를 앞두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제공
봉준호 감독은 원작 <미키7>가 출간되기도 전에 ‘미키’를 만났다. 워너브라더스는 미국 작가 에드워드 애슈턴의 이 소설이 초고에 불과하던 때 판권을 사들였다. 책은 인간을 복제할 수 있게 된 근미래, 얼음으로 뒤덮인 우주행성 개척을 위한 실험체가 된 미키 반스의 이야기다. ‘익스펜더블(exependable·소모품)’에 자원한 그는 거듭 위험한 임무에 투입된다. 그러다 죽으면 ‘프린트(복사)’ 된다. 과거의 감정과 기억을 지닌 채 복제돼 또 험지로 내몰린다.
워너브라더스가 <옥자>(2017)와 <미나리>(2020)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제작사 플랜B에 14쪽짜리 요약본을 보냈고, 플랜B는 이를 다시 봉 감독에게 보냈다. “소설이 좀 기이하니까 이상한 영화를 많이 찍는 저한테 흘러들어온 거죠.” 지난 19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만난 봉 감독은 작품의 콘셉트에 바로 매료됐다고 했다. “인간적인 얘기를 다뤄볼 수 있겠다는 생각”은 그가 영화화를 결심한 이유다.
현실과 ‘거리’를 만드는 SF···‘미키’에 투영되는 어느 청년들
<미키 17> 트레일러 영상 갈무리.
“산업재해 전문 노동자도 아니고, 죽는 게 직업(인 캐릭터)라니. 이상한 거잖아요.”
미키 뒤에 붙은 숫자는 그가 몇 번째 생을 살고 있는지를 뜻한다. 영화 속 주인공(로버트 패틴슨)은 16번의 잔혹한 죽음을 겪은 뒤 그 경험을 안고 재생된 17번째 미키다. 책의 ‘미키7’보다 10번 더 죽은 셈이다. 봉 감독은 “영화는 미키의 성장담이기도 하다”며 “17에서 18은 어른이 되는 숫자이기도 하니, 그 경계선을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미키17>은 봉 감독의 여덟 번째 장편 영화다. 공상과학(SF) 영화로는 네 번째다. 전작들은 한강에 괴수가 나타나거나(<괴물>, 2006), 빙하기의 지구를 달리는 열차에 칸마다 계급이 나뉘거나(<설국열차>, 2013), 대기업이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슈퍼돼지를 만들어내는(<옥자>, 2017) 독특한 설정 안에서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평범한 인물들이 벌이는 소동을 담아냈다. 각각 정치 현실, 계급 의식, 인간중심주의 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엿보였다.
이번 영화에선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냐는 질문에 봉 감독은 “포크로 메시지를 떠먹여주듯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재미와 아름다움이 우선이라 생각한다”며 “상황과 캐릭터와 말에 관객이 정신없이 끌려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봉 감독은 자신을 “사회학을 전공했지만 거대담론을 소화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대신 이상한 디테일이나 구석진 곳에 있는 것들로부터 출발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재출력되는 인간’이라는 콘셉트를 보고 그가 생각해낸 건 현학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질문들”이었다.
출력된 내 몸을 보면 어떤 기분일까? 죽어 마땅한 일에 계속 투입되는 게 아프고 고통스럽고 싫을 텐데, 이 사람(미키)의 피부엔 어떻게 와닿을까?
질문의 중심엔 청년 미키가 있다. “미키가 허허실실 웃어서 그렇지, 굉장히 잔혹한 상황에 부닥쳐 있거든요. 비겁한 공동체는 애 하나를 반복적으로 죽게 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요. 미키가 중요한 일을 하는데도 오히려 경시하죠.”
<미키 17>의 17번 미키와 18번 미키.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봉 감독은 미키가 처한 자리에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청년들을 놓았다. 그는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구의역) 스크린도어에서, (SPC 계열사) 제빵 기계에” 사고를 당한 이들을 말하며 “나열한 사건의 그 자리에 또 다른 분들이 일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미키가 복제되는 것이 판타지 같지만 김군 뒤에 박군이, 그 뒤에 윤양이···일자리는 유지되고 인간이 계속 교체되지 않냐”며 “견주어 보면 오히려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게 SF를 찍는 의미인 것 같다”고 말했다.
봉 감독은 “무엇이든 영화화를 할 때 시간적 거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SF 현실 같기도 한 12·3 비상계엄 사태를 영화화한다면 어디에 집중할 거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그는 “시간적 갭(차이)을 갖고 계엄과 쿠데타를 다룬 <서울의 봄>을 보고서도 (사람들은) 독재자에 치 떨려 하지 않았나”라며 “그나마 44년 전의 일이었구나 (위안했던 이들에게) 이번 비상계엄은 사실 상처고, 정신적인 집단 트라우마”라고 했다. 영화 속 독재자 마셜(마크 러팔로)이 저격당하는 장면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는 일각의 평에 대해서도 “이미 2021년에 시나리오를 다 썼던 것”이라고 일축했다.
오는 28일 국내 개봉을 앞둔 <미키17>은 2054년 우주에서 펼쳐지는 잔혹하고도 유쾌한 모험담이다. “우주에 가봤자 여전히 찌질하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그래서 정겹기도 한” 인물들의 이야기에서 ‘현재’를 찾아내는 건 관객의 몫이다.
<미키 17> 티저 포스터.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