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 대선이 가시화하는 요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화두는 ‘회복과 성장’이다. 지난 10일 국회 연설에서는 ‘공정 성장’과 ‘잘사니즘’을 비전으로 제시하고, 성장의 기회와 결과를 함께 나누어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다. ‘기본사회를 위한 회복과 성장 위원회’를 설치한다고도 했다. 성장을 둘러싼 우클릭 비판에 ‘분배’를 더해 응답한 셈이다.
성장해야 분배할 수 있다는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성장한다고 분배가 그냥 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껏 성장에 목매지 않은 정권은 없었다. 자본주의에서 성장은 정언 명령이다. 정부와 기업은 늘 구조적인 성장 압력을 받는다. 은행 이자를 갚고 투자자 수익을 보장하려면 기업은 매년 더 많은 이윤을 내야 한다. 성장해야 한다. 생산성 향상으로 고용 수요가 줄어 실업자가 느는 것을 막으려면 정부는 일자리 창출에 힘써야 한다. 성장해야 한다.
문제는 성장 후 분배다. 성장의 결실이 필요한 곳으로 돌아갈까?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성장이 세상을 더 정의롭고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는 ‘낙수효과’ 이론이 전혀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복음의 기쁨>). 물이 잔에 계속 떨어지는데도 넘치지 않는다면 그건 누군가 물을 마셔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럴듯해도 현실에서 입증되지 않는 이론은 틀린 것이다.
부의 분배 역사는 매우 정치적
성장이 분배로 이어진 적이 있기는 하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 서구는 성장의 결실을 사회기반시설 확충과 좋은 일자리 창출에 적극적으로 투자해서 큰 성과를 냈다. 하지만 그것은 저절로 된 게 아니라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필두로 한 진보적 시대의 결과였다. 이후 성장의 과실을 독식하려는 자본의 요구가 득세하며 성장에서 분배 효과는 사라졌다. 20세기 중반 여러 신생 독립국 정부도 처음에는 성장의 결과를 노동자 임금 개선, 보건과 교육 등 공공 영역에 돌리며 효과를 봤다. 하지만 계속해서 남반구의 값싼 노동력과 자원을 원하는 서구의 개입으로 상황이 변했다. 성장과 함께 실업과 빈곤과 불평등이 늘어났다.
토마 피케티가 지적하듯이 “부의 분배의 역사는 언제나 매우 정치적인 것”이다. ‘중도보수’로 정치적 입지를 설정하려는 이재명에게 성장을 분배로 가져갈 정치적 의지가 있을까? 말이야 그렇다고 하겠지만 금융투자소득세나 가상자산 과세에 관한 그간의 정책 행보를 보면 의구심이 든다. 정치인은 말이 아니라 정책으로 말한다.
유한한 지구에서 성장은 유한하다. 우리 몸도 어느 정도까지만 자란다. 그 후에는 성장보다 균형이 중요하다. 한계를 넘는 몸의 성장은 병이다. 한계가 있는 게 정상이다. 성장은 상품의 생산과 소비 증대를 뜻하고 한 나라의 성장은 국내총생산(GDP)의 증가로 나타난다. 성장은 우리가 자연에서 더 많은 것을 끌어내어 더 많이 만들고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버린다는 뜻이다. 지구는 점점 엄청난 쓰레기 더미로 변해간다. 자연의 복원력도 한계가 있다. 현재 추세라면 성장은 자원 고갈 전에 생태적 한계에 먼저 부딪힐 거다.
잘산다는 건 무엇일까? 성장하면 잘사는 건가? 성장하면 모두가 잘살게 되나? 광장을 빛으로 물들인 시민들이 갈망하던 ‘우리가 다시 만날 세상’은 GDP 증가로 도래하는 세상인가? 최근 보도를 보니 한국전력공사는 전북 서남권과 전남 신안의 해상 풍력으로 생산한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려고 전북 정읍에서 충남 계룡을 연결하는 176.6㎞ 구간에 송전탑 380개를 세우는 사업계획을 추진하다 지역주민의 반대에 부딪혔다. 송전선로가 지나는 지역은 정읍, 임실, 김제, 완주, 진안, 금산, 논산, 계룡, 대전이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탑을 세우면 GDP가 늘어난다. 성장한다. 이 성장으로 수도권은 조금 더 ‘잘사는 세상’이 될지 모르지만, 송전탑 지역주민은 그 세상에서 배제된다. 이런 식으로 만드는 ‘잘사는 세상’이 커질수록 배제되는 사람도 늘어난다. 남태령에서 전봉준투쟁단 농민과 함께 겨울밤을 지새운 시민들이 이런 ‘잘사는 세상’을 바랐을까? 그래서 다시 묻는다. 잘사는 건 무엇인가? 광장의 시민 덕에 정권 도전의 기회를 얻은 정치인이라면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
50년 동안 썩은 성장 판 갈아야
잘산다는 것은 기본적인 물질적 필요를 충족하고 사회적으로 평등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 사회 정의와 생태적 안전이 보장되는 세상을 뜻한다. 우리가 광장에서 갈망한 것도 이런 세상이 아닌가. 이제는 ‘50년 동안 썩은 판’을 갈아야 한다. 하지만 정치만 바꿔서는 효과가 없다. 성장이라는 판을 바꿔야 한다. 그러려면 정치도 경제도 바꿔야 한다. 우리 생각도 바꿔야 한다. 어렵지만 그것만이 진정 모두가 잘사는 세상,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길이다. 그 길로 갈 때 우리가 찾아야 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조현철 신부·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