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세 대표 하이디 라이히네크, 좌파당 부활 이끌어
메르츠 질타한 영상 700만 조회수…지지율 급등
극우 물결 거센 독일 정치권서 “희망의 빛”

독일 진보정당 좌파당의 하이디 라이히네크가 23일(현지시간) 총선 출구조사 결과가 나온 후 베를린에서 지지자들 앞에 모여 연설하고 있다. 라이히네크가 서있는 강단 뒤 스크린에는 “감사하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AFP연합뉴스
독일 진보정당 좌파당이 살아 돌아왔다. 사망 선고 직전 기적처럼 부활해 지난 23일(현지시간) 치러진 독일 연방의회 총선거에서 깜짝 이변을 만들어냈다. 좌파당을 궤멸 위기에서 심폐소생한 장본인은 36세 원내대표 하이디 라이히네크. 왼팔에 사회주의 혁명가 얼굴을 새기고, 58만 틱톡 팔로워를 보유한 라이히네크에게서 극우 돌풍에 지친 독일인들은 희망을 본다.
옛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을 일부 계승한 좌파당은 주요 지지 기반이던 동독 지역에서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득세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지난해 초 인기 정치인 자라 바켄크네히트가 본인 이름을 딴 좌익 포퓰리즘 정당 자라바겐크네히트동맹(BSW)을 따로 만들어나갔을 땐 미래가 없다는 평가가 나왔다. 지난해 6월 유럽의회 선거 득표율은 2.7%에 그쳤다.
좌파당은 지난달만 해도 전국 득표율 5% 기준을 채우지 못해 연방의회에서 퇴출당할 것이란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막판에 3%대 지지율을 한 달 사이 3배 가까이 끌어올리며 돌풍을 일으켰다. 정당 득표율 8.8%를 기록해 전체 630석 중 64석을 확보하는 기록을 썼다. 특히 18~24세 청년층 표 27%를 쓸어 담았다. 사회민주당(SPD)과 녹색당 지지층까지 끌어와 베를린에선 1위(득표율 19.9%)를 차지했다.
독일 언론들은 정치권이 우경화하고 AfD가 4년 전보다 2배 가까이 세력을 키운 시기에 라이히네크가 진보적인 젊은 유권자들 분노와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평화 군축, 사회적 평등을 핵심 의제로 삼는 좌파당은 이번 선거에서 부유세 도입, 이민자 권리 강화, 임대료 폭리 통제 등을 내걸었다. ‘신호등 다음엔 좌회전’을 구호로 삼았다.

독일 진보정당 좌파당의 하이디 라이히네크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연방의회 연단에 서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기성 정치인과는 사뭇 다른 라이히네크 이미지도 눈길을 끌었다. 자신을 사회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 반파시스트로 정의한 그는 왼쪽 팔뚝을 독일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루크 얼굴 문신으로 가득 채웠다. 기성 정치인에게 기죽지 않고, 일반 대중들에겐 친근하게 다가가는 모습도 신선한 점이었다고 독일 언론은 전했다.
특히 라이히네크의 2분짜리 연설 하나가 동영상 플랫폼 틱톡에서 바이럴(입소문)을 타며 유권자 지지를 끌어올렸다. 지난달 29일 의회 연단에 서서 반이민 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AfD와 협력하려는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연합(CDU) 대표를 향해 열변을 토하는 모습이었다. 라이히네크는 당시 “아우슈비츠 해방을 기념한 지 겨우 이틀 만에 당신들은 (나치와) 같은 이념을 고수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며 “당신은 공범이 되었고, 오늘 이 나라를 더 나쁘게 만들었다”고 쏘아붙였다.
연설 중간중간 동료 의원의 박수가 이어졌고, 독일 일간 타게스차이퉁(taz)은 이 연설을 두고 “새 별이 떴다”고 평가했다. 격정적인 몸짓으로 핏대를 세운 라이히네크의 영상은 틱톡에서 조회수 710만을 넘어섰다. 25일 기준 라이히네크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팔로워 수는 틱톡 58만명, 인스타그램 52만명을 웃돈다. 이번 총선에서 제2당으로 올라선 AfD 공동대표 알리스 바이델에 이어 가장 많은 수준이다. 진보당 지지자들은 그를 “하이디 여왕” “틱톡의 여왕” 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좌파당은 이후 독일 극우를 막아설 “마지막 방화벽”이라고 강조하며 SNS에서 공격적인 유세를 폈다. 선거 전략이 먹혀들어가면서 메르츠 대표의 극우 밀착 행보에 반대하는 한 시위에선 “프리드리히가 가득한 세상에 하이디가 되세요”가 적힌 플래카드가 등장하기도 했다. 좌파당은 선거를 앞두고 한 달 만에 신입 당원 3만명을 모집했으며, 15년 만에 당원 수가 최고치를 기록했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라이히네크가 연설한 지난달 29일 하루에만 1만7470명이 좌파당에 가입했다고 전했다.
유럽정책분석센터(CEPA)는 “좌파당은 전통적인 좌파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면서 접근법을 현대화했다”라며 “이런 방식이 젊은 유권자와 일반적으로 투표하지 않는 (정치) 환멸 유권자를 움직이는 데 효과적이란 것을 입증했다”고 분석했다.
독일 작가이자 언론인 파트마 아이데미르는 영국 일간 가디언 기고에서 “(좌파당의 약진은) 인종차별적 담론이 선거 운동에 깊게 뿌리내린 어두운 시기 독일 정치 지형에 희망의 빛”이라며 “정책 차이가 큰 탓에 연정에 참여할 순 없겠지만 더 강력한 야당이 되어 인권 문제와 부유층을 위한 경제 정책을 지적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총선을 성공적으로 마친 라이히네크는 그동안 부족했던 잠을 좀 자고, 타투이스트를 찾을 계획이라고 독일 언론 디벨트에 말했다. “지난 몇 주 동안 일부 남성 정치인들이 ‘화난 여성’에 얼마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지 체감했다”며 “연방의회 복귀를 기념하기 위해 문신을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여성의 분노는 종종 ‘히스테리’로 일축되지만 라이히네크의 팔뚝에는 곧 ‘화난 여자’라는 글자가 추가로 새겨질 예정이라고 디벨트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