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한 시대 국정의 최종 결정권자, 최후 책임자이다. 한가롭게 남 탓을 할 수 없는 자리다. 옛 왕조시대 임금들이 가뭄 때마다 기우제를 지낸 것도 하루하루 힘든 백성들의 삶에 정치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뉴스를 볼 때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도, 비가 오지 않아도 다 내 책임인 것 같다”고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도 그런 심경이었을 것이다.
해리 트루먼은 대통령직의 ‘무한책임’을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4선 임기를 시작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5년 4월 사망하자 당시 부통령이던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됐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 취임이 확정되자 “달과 별, 모든 행성이 내게 떨어지는 기분”이라며 그는 압박감을 토로했다.
하지만 트루먼은 역사적 책임을 강조하며 냉전기 세계질서를 바꿔나갔다. 취임 넉 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 루스벨트가 비밀리에 추진했던 핵무기 개발(맨해튼 프로젝트)을 승인했고, 이 무시무시한 프로젝트 실행 후 죄책감에 시달린 반핵운동가 오펜하이머를 달랬다. 트루먼은 1953년 퇴임 때도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대신 결정해줄 수도 없다. 그것이 바로 대통령의 일”이라고 했다. 책임을 회피하는 대통령은 실패한 게 아니라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무한책임이라는 대통령직 무게를 새길 때마다 그는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명패 문구를 가슴에 품었다고 한다.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대통령 윤석열 책상에도 이 문구가 적힌 명패가 놓여 있다. 2023년 5월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갓 취임한 윤석열에게 선물한 것이다. 하지만 집권 3년 동안 팻말은 무용지물이었다. “이 문구를 보며 대통령의 소명을 다짐한다” 했던 윤석열은 25일 탄핵심판 최후진술에서도 ‘2시간짜리 내란’, ‘대국민호소용 계엄’을 운운하며 온갖 궤변으로 일관했다. 12·3 내란의 진상을 밝히고 국민에게 사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음에도 끝까지 야당 탓만 한 채 책임을 비껴갔다. 대통령의 공적 책임을 일깨운 트루먼 명패를 한때 운운한 것부터 부끄럽고 참담하다. 윤석열의 명패 문구는 ‘The buck passes here’로 바꿔야 할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2월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청사에서 열린 ‘특별대담 대통령실 가다’에서 박장범 KBS 앵커에게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 선물인 ‘The buck stops here’ 팻말을 소개하고 있다. 대통령실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