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없는 유럽 안보’ 대비 나서…메르츠 ‘핵 공유’ 의지
장관급 G20 회의서 공동 국방기금 조성·자금 조달 논의
미국이 유럽을 배제한 채 러시아와 단독으로 우크라이나전 종전 협상을 시작하고, 유엔총회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노골적으로 러시아 편을 들자 유럽 대륙은 안보지형 격변을 우려하며 ‘미국 없는 유럽 안보’ 구상에 나서고 있다. 프랑스의 핵우산을 독일에 제공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으며, 유럽 공동 국방 기금 조성도 검토되고 있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24일(현지시간) 프랑스가 핵 억지력을 독일 등 유럽 동맹국에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고 보도했다. 미군의 유럽 철수에 대한 우려로 프랑스의 핵무기를 탑재한 전투기가 독일에 배치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정부 관계자는 “독일에 프랑스 핵 전투기 몇대를 배치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문은 독일 베를린에서 근무하는 외교관들의 말을 인용해 프랑스의 핵 공유 방안이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에게도 비슷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압박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전했다.
독일의 차기 총리로 유력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연합(CDU) 대표는 ‘유럽 자강’을 연일 강조하며 영국·프랑스와의 핵 공유 방안 논의를 촉구하고 있다. 총선 전인 지난 21일 메르츠 대표는 “유럽의 두 핵 강국인 영국·프랑스와의 핵 공유, 최소한 두 나라의 핵 방위가 독일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를 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핵 비보유국인 독일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핵 공유 정책에 따라 그동안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 아래 있었다.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독일에 핵무기 공유 방안을 제안했으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거절했다. 이런 독일의 입장 변화는 수십년간 이어온 독일의 안보 전략을 바꾸는 것이다. 영국 BBC는 “지진과 같은 변화”라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1945년 이후 미국이 유럽에 제공한 안보 보장을 철폐할 수도 있다고 밝히자 주요 유럽 국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논평했다.
유럽이 공동으로 국방 기금을 조성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날 레이철 리브스 영국 재무장관이 이번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개최되는 주요 20개국(G20) 회의에서 다른 유럽 국가들의 재무장관들과 국방 기금 조달 방법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나토 동맹국들에 방위 예산을 국내총생산(GDP)의 5%로 늘릴 것을 요구한 데 따른 것이다.
유럽 각국이 방위비 지출을 확대하는 데 유럽연합(EU)의 재정준칙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 EU는 회원국의 재정적자와 국가부채가 각각 GDP의 3%와 60%를 넘지 않도록 제한하고 있어 국방 예산의 급격한 증액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영국은 국제금융기관을 창설해 각국의 국방 투자를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1991년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등 사회주의권 국가의 시장경제 전환을 돕기 위해 출범시킨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같은 금융기관을 설립해 EU 재정준칙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공동으로 자금을 모은다는 구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