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걷다 보면 오래된 이층 목조 주택이 눈에 띈다. 전 일본 총리 호소카와 가문이 일제강점기에 춘포의 농지를 매입하며 지은 농가다. 시골집들 사이에 우뚝 서 있는 그 집의 이국적 자태를 보고 있노라면 춘포의 또 다른 이름, 대장촌이 떠오른다. 큰 농장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일본인 지주들이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다고 하여 불린 이름이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지우려 했지만, 지금도 동네 어르신들의 입에 붙은 건 춘포가 아니라 대장촌인 듯하다. 한 장소에 새겨진 역사는 언어에 오래 남는 법이니까. 내게도 그런 언어가 있다. 다라이, 땡깡, 요지, 단도리 같은 일본어. 할머니에게서 배운 말이다. 의식적으로 지웠으나 주의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소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웠던 할머니는 한글을 제대로 쓸 줄 몰라 경조사 봉투에 이름과 메시지를 적어야 할 때면 나를 부르시곤 했다. 할머니의 말을 옮겨 적는 대가로 내가 받은 것은 과자와 이야기였는데, 사실 나는 딱딱한 그 과자보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더 좋았다. 그건 나와 닮은 한 여성이 야만의 역사에서 살아남은 영웅담이자,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의 일이었으니까. 돌이켜 보면 나는 그 이야기 덕분에 내가 사는 곳을 기억이 축적된 장소로 인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20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은 정서적으로 깊이 연결된 장소였다. 단순히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이 아니라 장소의 기억과 경험이 나와 연결된 곳, 그곳에서 뿌리내리고, 나와 장소를 잇는 선을 조금 더 멀리까지 그려보고 싶었다.
캐나다의 지리학자, 에드워드 랠프는 장소 인식을 단순히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게 아니라 그 장소가 내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자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장소는 경험과 정체성이 축적된 곳이고, 그곳을 ‘인식’함으로써 장소를 하나의 배경이 아닌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장소를 인식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먼저 ‘걷기’가 있다. 걸으며 만난 장소를 감각하고 관찰하고, 감정적인 연결을 맺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이야기하기’다. 장소를 말하고 쓰며 그것의 증인이자 목격자를 자처하는 것. 나아가 새롭게 해석하고 구성하는 것. 그런 점에서 ‘이야기하기’는 장소의 과거를 현재와 결합해 미래로 보내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마을의 일본 농가는 내가 살아본 적 없는 역사의 흔적이지만,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매개로 그곳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내가 마주한 그 장소는 과거에 봉쇄되어 있지 않고 계절과 날씨와 시간과 함께 변하는 역동성을 가진 존재이며, 나는 그곳을 이야기하기 위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도를 해본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장소가 나의 일부이며 내가 장소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당신은 당신이 서 있는 그곳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장소의 익명성과 가상의 세계에서 표류하며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는 불안감을 느낀다면, 실체 없는 관계를 맺으며 정체성을 고민한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기억과 경험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알려줄 존재를 비추는 장소일 것이다.

신유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