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민주당은 원래 진보가 아니라 중도보수 정당이란 선언을 두고 당 안팎에서 찬반이 이어지고 있다. 이 대표의 중도보수 선언은 정치공학적 계산에 따른 준비된 발언이다. 특히 조기 대선 캠페인용 포지셔닝 작업 중 하나다.
우선 국민의힘을 극우로 밀어내려는 의도가 담겼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국민의힘의 극우적 행태에 실망한 보수 유권자들을 흡수하겠다는 계산이다. 이 대표는 최근 국민의힘을 ‘극우 정당’ ‘극우 파시즘’으로 꾸준히 호칭하고 있다. 실제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심판 과정에서 국민의힘의 행태는 극우 정당으로 기울고 있다. 하버드대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교수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전제주의를 가리키는 4가지 신호로 헌법·선거제 등 민주주의 규범 거부, 폭력 조장이나 묵인, 정치 경쟁자 부정, 언론 등 비판자의 기본권 억압을 들었다. 국민의힘에서는 이런 신호가 모두 확인되고 있다. 중도보수의 넓은 들판을 버리고 극우라는 좁은 골목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중도보수 선언은 진보 진영과의 경쟁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진보 유권자들을 대표할 수 있는 경쟁 정당이 사라진 상황인 만큼 더는 진보 이미지에 집착하지 않고 반계엄 보수 유권자 견인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로 시작된 진보정당과 민주당의 경쟁은 지난 총선에서 정의당이 원외 정당으로 밀려나면서 사실상 끝났다. 게다가 민주당은 진보당 등을 비례위성정당으로 받아들여 왼쪽 공간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12석을 가진 조국혁신당이 민주당 왼쪽에 있지만 진보 정당이라기보다는 범민주당 계열에 가깝고, 조국 대표의 부재로 급격히 힘을 잃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혁신당의 구호가 ‘지민비조(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는 조국혁신당)’였다는 점만 봐도 두 정당은 경쟁보다는 공생 관계에 가깝다. 장혜영 전 정의당 의원이 “기어코 진보정당들의 독자 세력화를 주저앉혀 진보가 궤멸되니 이제 민주당은 자기가 보수라고 한다”고 비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실 민주당은 중도보수가 맞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중도보수로 변한 게 아니다. 우리 당(당시 국민회의)은 시작 때부터 중도우파를 표방했다”고 했고,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으로 보수로의 외연 확장을 꾀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새누리당(현 국민의힘)과 대비해서 진보라는 소리를 듣지만 당의 정체성은 그냥 보수 정당”이라고 했다. 물론 두 전직 대통령의 발언은 보수 세력의 색깔론, 프레임 짜기 공격에 대응하는 성격도 있었다. 따져보면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출현할 때까지 한국 정치에서 진보 유권자의 목소리를 대변할 원내 정치 세력은 부재했다. 민주당은 진보 쪽 인재를 수혈받고 그들의 목소리를 부분적으로 반영하면서 왼쪽 영역을 관리했다. 견고한 양당제 구도에서 민주당은 진보 정치의 장애물이기도 했다. ‘나쁜 놈 대 덜 나쁜 놈’ 대결 구도에서 진보 성향 유권자들은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강요받았다. 진보 정당이 후보를 내면 보수 집권을 돕는다고 비판받았고, 진보 정당에는 ‘민주당 2중대’ 꼬리표가 붙었다.
- 정치 많이 본 기사
이 대표의 중도보수 고백은 정체성 확인이란 점에서 환영할 일이다. 아무리 실용주의라고 해도 한 정당이 보수이면서 동시에 진보일 수는 없다. 도대체 뭘 할지 모르고 권력욕만 있는 그런 정당에 표를 줄 수는 없다. 문제는 이러다간 중도보수 제1당을 극우 성향 제2당이 견제하는 정치 지형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 무상급식, 고교 무상교육 등을 이슈화했던 민주노동당처럼 보수 민주당에 진보적 의제를 압박할 정당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민주당이 성장, 기업, 경제를 이야기할 때 분배, 노동, 환경을 이야기하는 정당도 원내에 있어야 한다.
이 대표가 중도보수 발언의 진정성을 인정받으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제도 개편이다. 진보인 척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만큼 진보 유권자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을 2중대로 두려 하지 말고 홀로 설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등 다당제 기반을 강화할 선거제도 개편,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제 도입, 작게는 국회 교섭단체 요건 완화 등 방안은 다양하다. 윤 대통령 파면 여부가 결정되면 이 대표는 개헌 등 정치개혁에 대한 입장을 내놓을 것이다. 거대양당 기득권 체제를 완화하고 민주당과 진보 정당 간의 정당한 대결을 보장할 제도 개편안이 제시돼야 한다.

박영환 정치국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