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봄이다. 엊그제 눈 치우느라 애먹었고 계곡엔 살얼음도 남아있지만 달래, 냉이가 언 땅을 뚫고 나오는 거부할 수 없는 봄이다. 움트고, 피어나고, 깨어나는 봄이 이곳 남도에서는 느낌이 좀 다르게 다가온다. 요맘때면 이유 없이 두통이 빈번해지고 경운기 시동 소리에 맞춰 심장이 요동을 친다. 고혈압이나 심부전의 문제가 아니라 계절성 정신질환에 가깝다. 몇년 새 증상이 악화하는 추세에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일단, 꽃으로 온통 난리가 난다. 어느 한 번 예외가 없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꽃은 ‘속씨식물의 유성생식기관’ 혹은 ‘종자식물의 번식기관’이다. 벌이나 나비를 유혹하려고 화려한 편이다. 사람들이 그걸 보고는 곤충처럼 환장한다. 보통 상춘객들 차량의 유랑 속도는 딱 시속 40㎞. 그나마 그대로 계속 가면 좋겠지만 편도 1차선 도로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영 포인트가 아닌 곳에서 사진을 찍겠다고 불쑥 내리곤 한다. 이렇게 저렇게 밭에 도착하고 나서야 내가 무호흡 상태인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많이 힘들다.
오늘 아침,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유헌아, 봄이라구 너두 바쁘냐? 거기는 꽃 폈지? 그쪽이 산수유랑 매화 죽여줄 때 아니냐. 아 참, 인터넷에서 보니까 거 왜 지자체 이름 앞에 붙이는 수식어 있잖아. 거기는 그게 자연으로 가는 길이더라. 캬, 자연으로 가는 길 구례. 너무 멋있다. 다음주에 함 내려갈게. 많이 안 바쁘지?” 자연으로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봄이 내키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농사 때문이다. 확 바빠진다. 겨울의 달착지근한 추위를 좀 더 누리고 싶은데 맘 같지 않다. 겨우내 야들해진 팔다리엔 근육의 흔적만 남아있고 관절은 여전히 뻑뻑한데 농사일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때를 놓치면 1년을 후회하고 내년을 기다려야 한다. 어르신들은 “봄이면 고양이 손도 빌려 쓴다”고 하셨다. 동네에 고양이는 많은데 손을 빌리는 방법은 전해지질 않는다. “봄 농사 한 번에 삼년 지어묵으믄 좋겄구마” 말씀하시는 걸 보면 농사 고수들도 어쩔 수 없나 보다.
봄의 첫 작물은 감자다. 6월 하지 무렵에 캐 먹어서 흔히 ‘하지감자’라고 하는데, 100일 정도 생육기간이 필요하니 3월10일 전후로 심어야 한다. 있는 땅에 푹 찔러 놓는 게 농사면 얼마나 좋을까. 심기 전에 감자 눈을 따서 씨감자를 준비하고 훈탄과 거름을 뿌린 뒤 땅을 갈고 두둑을 만들어야 비로소 감자를 심을 수 있다. 심은 뒤에도 싹 주변에 흙을 보태는 북주기 작업을 해야 하고 무분별한 싹을 정리해야 첫 수확의 자격을 갖는다.
봄이 유별난 건 명칭에서도 드러난다. ‘새봄’은 있어도 ‘새여름’은 없다. 모든 계절이 새로울 터인데 봄에 대한 대접만 다르다. 봄의 어원이 ‘본다(見)’에서 왔다고 한다. 볼 것이 많아지니 그렇겠거니 한다. 그러고 보니 나머지 계절과 달리 봄만 한 음절이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한 글자로 된 명사가 많다. 눈, 코, 입, 흙, 땅, 물, 밥, 똥.
이러니저러니 해도 새로운 시작이다. 남자들이 군대 얘기를 자주 하는 건 고통의 유효기간이 추억의 유통기한보다 짧아서라고 한다. 다행이다. 끝내 잊지 말아야 할 것도 있겠지만 시작과 희망에 방점을 찍고 싶다.

원유헌 구례 사림마을 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