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안 영동리 회화나무
농경문화 시대의 선조들은 일상적으로 나무를 심었다. 언 땅에 봄볕 스미면 한 해 농사를 채비하며 마을 앞 들녘에, 자식을 낳으면 뒤란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묘지 앞에 나무를 심었다. 굳이 기록으로 남길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오래된 나무의 식재 기록을 찾기 어려운 이유다.
<괴정기(槐亭記)>라는 기록으로 나무를 심어 키운 과정을 또렷이 남긴 ‘함안 영동리 회화나무’는 그래서 남다른 나무라 할 수 있다. 개항기에 활동했던 이 마을 선조 안종창(安鍾彰·1865~1918)이 남긴 기록이다.
천연기념물인 ‘함안 영동리 회화나무’는 광주 안씨의 22대조 안여거(安汝居·생몰연대 미상)가 성균관 훈도를 지낸 뒤에 이 마을에 보금자리를 일으키며 손수 심은 걸로 전해진다. 이 회화나무를 안종창은 ‘괴정’이라고 하고 그 기록을 남겼다.
“마을 앞에는 북서쪽 위에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있다”로 시작하는 <괴정기>에서 안종창은 이 나무를 “줄기가 수십 아름이나 되고, 높이가 수백 척쯤 되며, 그 그늘은 수백 명을 덮을 수 있다”고 표현했다. 그의 나무에 대한 애정을 충분히 짐작할 만한 지나친 과장이다. 덧붙여 “나무 그늘에 앉아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나뭇가지에서 피리 소리가 들려온다”는 문학적 표현과 함께 나무 곁에서 벌어지는 사람살이를 아름답게 기록했다.
500년쯤 살아온 걸로 짐작되는 ‘함안 영동리 회화나무’는 나무 높이 19.5m, 가슴 높이 줄기 둘레는 5.78m로, 우리나라의 회화나무 가운데에는 매우 큰 나무에 속한다. 특히 사방으로 호연하게 뻗은 나뭇가지 펼침은 회화나무 전형의 기품을 갖췄다. 세월의 더께가 겹겹이 쌓였지만, 여전히 생육 상태가 건강하다는 것도 이 나무의 남다른 특징이다.
마을 사람들은 입향조가 심은 이 나무를 마을 살림살이를 지켜주는 신성한 나무라고 믿으며, 해마다 음력 시월 초하루에 나무 앞에서 마을 동제를 올린다.
나무와 더불어 살아온 사람살이의 기록으로 남은 <괴정기>와 함께 오래오래 지켜야 할 우리의 소중한 나무다. 나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