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이 선언한 대로 민주당은 보수정당이 맞다. 그의 민주당은 시장·성장 중시, 감세와 같은 보수 노선을 따른다. 이재명 이전에도 민주당은 보수였다. 노동자 계층을 지지기반으로 둔 적도, 분배 정의, 불평등·기후위기 해소, 재벌개혁, 소수자 차별 금지를 우선한 적도 없다.
한국은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가진 나라가 아니다. 민주주의 40년에도 견고한 보수 헤게모니는 겨우 생존하던 정의당의 퇴출로 이미 입증됐다. 한국 정치는 보수정당 경쟁체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민주당=진보, 국민의힘=보수’로 짝짓는 걸 즐긴다. 명색이 선진국인데 다원성 없는 ‘결손 민주주의’를 인정하자니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지 정치가 진보와 보수 두 바퀴로 굴러간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두 바퀴론은 주관적 인식일 뿐이지만, 우리의 언어습관, 정치 담론이 만들어낸 현실이기도 하다. 정치에서는 종종 객관적 사실 못지않게 주관적 인식이 중요할 때가 있다. 다수가 민주당을 진보라고 여기는 한 민주당은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 실제 민주당은 때때로 진보적인 무언가를 했다. 이재명 보수선언에 누구는 잘한 결정이라고, 누구는 정체성 부정이라고 반응하는 것도 이러한 민주당의 이중정체성 때문이다.
지지자들은 이중정체성이든 삼중정체성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을 이재명, 혹은 민주당과 묶어주는 것은 이념·정책이 아니라, 상대 당을 싫어하는 부정적 감정이다. 흔히 이념 갈등이 정치 양극화의 원인이라고 하지만, 그게 맞다면 이재명 보수선언으로 양당 갈등은 완화돼야 한다. 특히 이재명·한동훈은 보수이념, 계엄 반대, 탄핵 찬성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한동훈은 “이 대표가 행정부까지 장악하면 유죄 판결 막으려 계엄할 것”이라고, 이재명은 “개 눈에는 뭐만 보인다”며 자기들의 솔직한 감정을 교환한다. 이게 양극화다. 양극화는 이념·논리의 산물이 아니라, 원시적 감정의 결실이다.
이재명은, 국민의힘이 극우로 옮겨갔으니 보수의 빈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지만, 양극화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민주당이 진보여서 좋아하지 않았지만, 보수선언에 마음을 바꿔 먹기로 한, 이념적 사고에 충실한 보수 시민이 얼마나 될까?
한국 정치에서는 진보가 아니라고 해서 진보가 아닌 것이 되지 않고, 보수가 아니라고 해서 보수가 아닌 것이 되지 않는다. 보수층은 이재명이 국민의힘을 아무리 극우라 호명해도 민주당을 적대하는 이유만으로 국민의힘을 응원할 이유를 찾는다. 이들이 민주당을 진보 아닌, 보수로 받아들인다 해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이재명이 주저앉지 않는 한 무슨 이유로든 민주당을 반대할 마음으로 뭉친 ‘감정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이들이 헌신하는 진짜 이념이 있다면, ‘이재명 거부’라는 이념일 것이다.
이재명이 이 거부자들을 정말 설득하고 싶었다면, 보수선언이 아니라, 신뢰할 만한 지도자라는 확신을 갖도록 정치적 태도를 바꿔야 한다. 그럼에도 그가 보수선언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 양극화에서 정치적 태도 변화는 어려운데 반해 이념·정책 바꾸기는 쉽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신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완화한다는, 불가능한 목표를 위해 개혁 과제를 제물로 바친 것이다.
민주당은 보수지만, 진보 지향성을 지닌 보수다. 민주당은 진보 없는 세상에서 진보 의제 일부를 떠맡는 역사적 책임을 스스로 짊어졌다. 그 책임감 때문에 민주당은 어려운 과제와 씨름을 해야 했다. 지향성은 민주당이 안이해지고 후퇴할 때 민주당을 내려친 죽비였다. 뿌리 깊은 보수주의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진 게 있다면 민주당이 이 책임의 일부라도 실천하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보수선언은 이 책임을 내려놓는다는 선언이다. 지향성 없는 민주당은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려는 동기를 잃을 것이다. 내적 긴장감을 놓아버리고, 경각심의 고삐를 풀어버린 민주당,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다.
내란 충격이 다 가시지 않은 지금, 내란 계기로 시민사회가 사회대개혁을 고민하는 이때 민주당은 원래의 보수 자리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울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잠도 오지 않았던 그 많은 날들이 또 하나의 보수 정권 탄생을 위한 것인 줄 누가 알았을까?
우리 민주주의는 지금 내란 충격, 극우화 도전에 이어 민주당 보수화라는 삼각파도 앞에 놓여 있다.

이대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