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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보의 대갚음

입력 2025.03.04 21:14

“이쪽 자리에 앉으세요.”

금요일 오후 10시쯤, 4호선 지하철 안이었다. 상경해 공부 모임에 참여한 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부근의 숙소로 향하던 중이었다. 열차 칸 모퉁이에 서 있는데 대각선 방향에서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분이 일어나더니 조심스레 다가와 어깨를 톡톡 쳤다. 그리고 저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네? 어… 고맙습니다.” 엉겁결에 꾸벅하고 앉긴 했으나 기분이 묘했다. 생물학적으로 이제 청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하철에 서 있기 힘들 나이는 결단코 아닌데. 소속된 연구자 집단이나 직장 공동체에서 이른바 ‘막내라인’은 벗어났으나 여전히 주니어급으로 분류되는데. 구태여 다가와 자리를 양보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몇가지 가능성을 떠올려봤다. 첫째, 전날 밤 마트 할인 코너에서 구매한 맛난 연어를 배불리 먹고 잠들어 살이 오른 데다 나팔꽃 모양으로 퍼지는 허리선 높은 코트를 입고 있어 임신부일 거라 짐작했다. 둘째, 뒤풀이 자리에서 받아마신 술 몇잔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인해 안정이 필요한 취객으로 오인했다. 셋째, 이쪽에선 미처 기억 못하는 우리 학교 졸업생이 ‘예전에 저분 수업을 들은 적 있는데’ 하며 호의를 표시했다. 넷째, 설마 내게 반해서?(이건 정말 아니다.)

그날 밤 말똥말똥 잠 못 이루다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10여년 전 버스 안의 일이다. 종로2가 정류장에선가, 한산했던 차내로 인파가 밀려들었다. 한 노신사가 내 자리 앞으로 오셨다. 아주 연로한 분은 아니었던지라 여기 앉으시라고 말 건네긴 조심스러웠지만 그대로 앉아 있기도 마음 쓰여, 하차하는 시늉을 하며 뒤편 문 옆으로 가서 섰다. 이윽고 그분이 그 빈자리에 앉으셨다. 얼마나 더 지났을까. 급정차로 버스가 심하게 흔들려 나를 포함한 몇몇이 휘청였다. 무심결에 뒤돌아본 그분은 기둥을 붙잡고 있던 나와 눈을 마주쳤다. 놀란 상대방의 눈길이 ‘당신 아까 안 내렸어?’ 묻는 듯했다. 마침 그날 큰 호주머니가 부착된 독특한 스타일의 원피스를 입고 있어 잠시 봤음에도 내 인상착의를 기억하셨던가 보았다. 상황을 짐작한 그분의 표정이 굳어졌다.

다음 정류장에서였다. 버스에 새로 올라탄 앳된 얼굴의 청년을 본 그분은 “학생, 이리 와서 좀 앉아요” 하셨다. 의아해하는 주위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나 옷자락을 이쪽으로 끌어오시기까지 했다. “예?” 당황해 한쪽 귀에서 이어폰을 빼며 되묻던 그를 기어코 앉히고 옆으로 비켜서며 혼잣말하시는 걸 들었다. “내가 영 기분이 상해서…” 그 완강한 뒷모습은 ‘아직 대중교통수단에서 자리 양보받을 나이는 아니란 말이다’ 항변하는 듯했다. 버스가 덜컹덜컹하는데 손잡이도 잡지 않고 바위처럼 서 계신 것이었다.

섣부른 마음 씀이 도리어 저분의 마음을 다치게 했구나. 무안했고, 무엇보다 죄송했다. 그렇다고 다가가 사과드리려 하면 한층 어색한 장면이 연출될 듯했다. 고개 숙인 채 바닥만 보고 있는데, 떨군 시선에 아까 우격다짐으로 자리에 앉혀졌던 이의 팔이 포착되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보게 되었다. 볼멘 표정으로 오른손을 왼쪽 소매에 갖다 대어 본인 팔의 알통을 만져 확인하는 모습을. 웃음이 나려 해서 머플러를 돌돌 휘감아 입꼬리를 감췄다.

헤아려보자면 이렇다. 앞선 사정을 모른 채 버스에 오르자마자 손위분께 자리를 양보받은 그는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일지 의아했을 테다. 그러다 본인이 야위고 허약해 보여서인가 오해해 억울했던 걸까. “비록 어깨는 좁아도 내가 얼마나 튼튼한데!” 자기 팔뚝 근육량을 남몰래 체크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그날 밤 지하철 건에도 나로선 짐작 못할 전후 맥락이 있었을지 모른다. 세상은 둥글고 둥그니 또 어찌 알겠는가. 그때 그 알통 학생이 10여년 지나 이렇듯 양보를 대갚음했을지.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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