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양회 계기 중국 외교정책 기자회견
미국 압박에 맞서겠다면서 대화도 촉구
우크라이나 등 답변…한반도 언급 없어

왕이 중국 공산당 외사판공실 주임 겸 외교부장이 7일 베이징 미디어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EPA연합뉴스
“미국은 수년간의 관세·무역전쟁으로 대체 얻은 것이 무엇인가?”
왕이 중국공산당 외사판공실 주임 겸 외교부장이 7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 부과에 강한 비판을 쏟아냈다. 왕 주임은 중국은 미국의 대중국 압박에 단호하게 맞서겠다면서 양국의 대화와 공존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도 내놓았다.
중국이 개발도상국의 파트너라는 점을 강조했으며 트럼프 대통령의 ‘가자지구 점령’ 구상을 비판했다. 한반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미국에 “책임 있는 대국의 자세” 촉구
왕 주임은 이날 중국 연례 정치행사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인민정치협상회의)를 계기로 베이징 미디어센터에서 열린 외교 분야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상호존중이 국가 간 관계의 기본이자 중·미관계의 중요한 전제 조건”이라면서 “미국이 협력을 택한다면 호혜공영을 실현할 수 있지만, 한사코 탄압한다면 중국은 단호히 반격하겠다”고 말했다.
왕 주임은 “세계 최대 개발도상국인 중국과 선진국인 미국은 이 행성에 오래 존재할 것이고, 따라서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은 계속해서 중·미 관계의 안정적이고 건강하며 지속 가능한 발전에 힘쓸 것”이라며 “우리는 미국이 중국과 함께 양국과 세계에 도움 되는 올바른 공존의 길을 걷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중국은 미국과의 대화를 원하지만 미국의 대중국 압박에 팃포탯 전략(눈에는 눈, 이에는 이)으로 맞서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왕 주임은 트럼프 대통령이 한 달 사이에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20% 인상한 명분으로 든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 유입 문제와 관련해 “중국은 인도주의 정신에 따라 각종 도움을 제공했다. 미국은 은혜를 원수로 갚아서는 안 되고, 이유 없이 관세를 높여서는 더욱 안 된다”며 “이는 책임있는 대국의 자세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왕 주임은 이어 “미국은 돌아봐야 한다. 당신들이 최근 관세 전쟁과 무역 전쟁에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무역 적자가 확대됐나 축소됐나. 제조업 경쟁력이 올라갔나 내려갔나. 인플레이션이 좋아졌나 나빠졌나”라며 미·중 무역관계는 상호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고 환기했다.
남반구와의 협력 강조…가자 점령구상 비판

왕이 중국 공산당 외사판공실 주임 겸 외교부장이 7일 베이징 미디어센터 기자회견장에 입장하면서 취재진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EPA연합뉴스
왕 주임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유엔 등 국제기구를 무시하는 행동에 대한 비판도 내놓았다. 그러면서 개발도상국의 입장과 다자주의를 강조하는 중국의 입장을 부각했다.
왕 주임은 “세계에 190여개 국가가 있는데 모든 국가가 자국 우선을 강조하고 힘의 지위에 빠져있다면 이 세계는 정글의 법칙으로 회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세계는 정글의 법칙으로 돌아가는 일을 피하기를 원한다”며 “일부 국가에서는 유엔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지만 중국은 모순이 복잡할수록 유엔이 더 중요해져야 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왕 주임은 지난해 11월 시진핑 국가주석이 글로벌 발전을 지원하기 위한 중국의 8대 조치를 발표해 남반구 발전 지원 계획을 내놓은 일을 언급하면서 “국제정세가 어떻게 변화하든 중국은 남반구를 염두에 두고 남반구와 협력하며 인류 발전 역사의 새로운 장을 써 내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왕 주임은 트럼프 대통령이 가자 지구를 점령하고 팔레스타인을 이웃 국가로 이주시키려 한다며 중국의 입장을 묻는 질문에는 “가자는 팔레스타인 인민의 것이며 팔레스타인 영토와 분리할 수 없다”며 “두 국가 해법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답했다.
역키신저 전략? 중·러우호 변함없다
왕 주임은 미·러 관계 회복이 중·러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묻자 “성숙하고 강인하며 안정된 중·러 관계는 순간순간 변화하는 게 아니고 제삼자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 혼란한 세계의 상수이지 지정학적 게임의 변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닉슨 대통령 시절 미·중수교로 소련을 고립시킨 것에 빗대,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과정에서 러시아 편을 들어 중·러 밀월 관계를 끊어내 중국을 고립시키려 한다는 이른바 ‘역키신저’ 전략 구상을 하고 있다는 일각의 분석에 대해 그런 구상이 있더라도 실현될 가능성은 없다며 선 그은 것이다.
왕 주임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서는 “한 국가의 안보는 다른 국가의 불안 위에 세워져선 안 된다”며 “공동·종합·협력·지속가능한 신안 보관을 실천해야 유라시아 대륙과 세계의 항구적 안정을 진정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으로부터 안전 보장 없이 광물 협정을 종용받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안보 위협이 된다고 주장하는 러시아 사이에서 표면적 중립 입장을 재확인한 발언이다.
왕 주임은 “중국은 어떤 상황에서 평화유지군을 파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뚜렷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일본 향해서는 경고…한반도 언급 없어
왕 주임은 일본을 향해서도 뼈 있는 말을 던졌다. 그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 재개 가능성을 묻는 일본 기자에게 “중국은 책임지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법규에 따라 적절히 처리할 것”이라고 했다.
왕 주임은 이어 올해가 항일전쟁 승리(중·일전쟁 종전) 80주년이라고 언급하며 “양심과 신용의 시험에 직면한 일본은 평화헌법 정신을 지키면서 계속 평화발전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대만의 유사사태가 일본의 유사사태’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대만을 빌미로 일을 내면 일본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임을 명심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오키나와 미군 기지도 공격 대상이 되는 등 일본도 전쟁에 휘말리기 때문에 일본이 대만 방어에 적극 개입해야 하며 이를 위해 평화헌법 개정도 필요하다는 논리를 겨냥한 발언이다.
왕 주임의 이날 기자회견은 1시간 30분가량 진행됐다. 왕 주임은 중국 매체들과 러시아·미국·인도네시아·영국·튀르키예·나이지리아·파키스탄·프랑스·일본·브라질·싱가포르·인도 등 모두 23개 매체의 질문에 답했다.
한국 매체의 질문은 받지 않았고, 한·중관계나 한반도 문제에 관한 견해도 밝히지 않았다. 왕 주임은 지난해 양회 계기 기자회견에서는 “한반도에서 전쟁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