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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과 우애로서의 민주주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의 첫 문장을 “모든 국가는 분명 일종의 공동체이며, 모든 공동체는 좋음을 실현하기 위해 구성된다”라고 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적 사례를 들며 귀족정, 참주정, 과두정, 민주정에 대해 말하는데, 오늘날의 관점으로 읽거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차지하고 있는 서양 정신사의 후광에 기대 무슨 실용을 기대한다면 별 재미를 못 볼 가능성이 크다. 특히 현재의 ‘민주주의’가 모욕당하고 오염되고 있다고 해서 그에게 철학적 응원을 바란다면 더 그럴 것이다. 단언하자면, 이 책은 근대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철학서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와 노예라는 존재를 당연한 듯 인정했고, 심지어 노예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경멸하기까지 했다. 나아가 빈민이 지배하는 민주정이 중용을 잃으면 부자의 재산을 빼앗는 일들이 벌어져 국가의 존속이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엘리트적’인 관점은 노동자인 직공을 ‘전쟁 기술자’의 비유로 쓰거나, 기능적인 일에만 능한 비속한 존재라고 부르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그에게 노동은 자유민의 여가를 위해 필요하며 “육체노동은 정신을 저해”할 뿐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로 비위 상하는 발언들이지만, 그렇다고 멀리 던져버릴 책인 것도 아니다. 도리어 우리가 잊고 사는 가치에 대한 뜻밖의 계발을 가능하게 한다.

우애야말로 국가를 위한 ‘최고선’

윤석열의 쿠데타 이후 우리를 놀라게 한 점은 두 가지다. 농민이나 노동자, 성소수자를 향한 연대의식이 확인됐다는 것이 가장 먼저다. 즉 보다 좋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현실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반대쪽의 짙은 그림자가 우려의 수준을 넘어섰다는 충격과 함께 그간의 정신적, 실천적 나태를 돌아보게 한다. ‘부정적인 광기’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극우의 난동은 사실 우리를 여러 가지 면에서 우울하게 한다. 이 파시즘의 봉기에 대한 분석과 함께 비관 혹은 낙관들이 피력되지만, 과연 이들을 좋은 민주주의의 대열에 어떻게 참여시킬 것인지는 아직 요원한 문제다.

신자유주의와 함께 우리 사회는 현재 심각한 양극화와 정신적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는 세계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각 나라의 형편에 따라 그 발현 형태가 다르지만 이게 정신적 질환에 가깝다는 점은 공통된 사실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체제를 물구나무 세우면,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를 이루는 요소의 반대 명제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이런 물음은 어쩐지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지만 너무도 답이 간단하고 지당한 말이라 눈앞의 막막함을 거둬주지는 않는다.

자본주의 경제는 빈곤을 양산해서 어딘가로 ‘수출’하지 않으면 성장, 발전하지 못한다. 오늘날 당연한 듯 말해지는 자유무역에는 상품의 교역만 있는 게 아니라 경제적 빈곤도 끼어 있는 게 사실이다. 이 말은 이제 우리의 ‘상식’이 되어버린 경제성장의 풍요는 누군가의 또는 어딘가의 빈곤과 수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진실을 가리킨다. 어떤 경제학 논리로도 자본주의 경제가 성장할수록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이 진실을 지우지 못한다. 뭐, 은폐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만일 이 어두운 진실을 부정하고 싶다면 그는 이미 경제성장의 풍요에 미혹돼 있거나 그 풍요의 열매에 취해 제 알몸을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일 게 분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귀족정, 참주정, 과두정, 민주정의 장점과 폐단의 변천사를 탐구하는 목적은 어떤 정체가 ‘좋음’과 ‘덕’을 추구하는 데 적합한지 찾으려는 철학적 여정이다. 비록 노예제에 대한 그가 살던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벗어나지 못했고, 육체노동에 대한 비하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지만 노예와 농민, 직공 등 민중이 국가 공동체에서 차지하는 역할이나 중요성을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는 국가가 ‘좋음’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되려면 귀족이나 부자, 자유민, 민중이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고 중용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정의·덕 추구해야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시간을 초월한 절대적 가치로 받아들이면 안 되지만 몇 가지 사항은 우리가 상상하는 좋은 민주주의를 위해 유념할 것들이다.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정의와 덕을 추구하는 존재이므로 “우애야말로 국가를 위한 최고선”이며, 정치적으로 지배하고 지배받는 일은 번갈아 수행되어야 하고, 재산에 대한 탐욕을 절제하면서 “서로 민주주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당연히 “이익 문제로 대중을 모욕”하는 것은 금물이다. 즉 혐오와 탐욕의 문화가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현재 상황과 연결해 말하자면 좋은 민주주의는 제도나 정책 이전에 공동체의 문화가 먼저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는 기후위기의 근원적 해법이기도 한 것 아닌가? 우리가 너무 단기적인 공학적 해법에 매몰되어 살아온 것은 아닌지, 끝나지 않은 쿠데타가 묻는 것만 같다.

황규관 시인

황규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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