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은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처음 맞이한 여성의날이었다. 여성들이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싸워서 쟁취한 것들을 기념하고, 평등을 요구하는 여성의날의 의미는 예년과 다를 바 없었지만 올해는 여성, 특히 10~30대 여성이 ‘광장의 주역’으로 우뚝 섰다는 점에서 각별했다.

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인근에서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최한 ‘제40회 한국여성대회’가 열리고 있다. 이준헌 기자
‘응원봉’을 들고 거리와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여성들은 스스럼없이 무대에 올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목놓아 외쳤다. 이들의 목소리는 탄핵 촉구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국회 앞에서 농민들의 시위가 있었던 남태령 고개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출근길 집회가 열린 안국역으로, 해고 노동자들이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는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투쟁 현장으로 옮겨가며 연대했다. “탄핵 이후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여성들의 외침은 이들이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평가됐다.
문제는 거리와 광장에 쏟아진 이들의 주장과 요구를 어떻게 관철할 것인가이다. 헌법재판소의 윤 대통령 탄핵심판 결론이 임박하면서 한국 사회가 급속히 대선 정국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지만 여성의 목소리는 또다시 외면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정치권이 유불리에 따라 여성을 소환했다가 외면하는 행태가 반복될 조짐이 있다는 것이다.
‘여성·젠더 이슈’ 소환된 탄핵 촉구 집회 무대
계엄 사태 이후 탄핵 촉구 집회에서는 윤 대통령 탄핵 외에도 ‘여성 및 젠더 이슈’에 관한 요구와 목소리가 유독 높았다. 광장에 나선 여성들이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를 직접 제기하고 해결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21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동십자각 앞에서 열린 윤석열 즉각 체포·퇴진! 사회대개혁! 범시민 대행진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성동훈 기자
무엇보다 이들은 우리 사회가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자신을 ‘20대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한 여성은 지난 1월5일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 집회에서 “페미니스트 여성이라고 해서 차별과 혐오, 폭행과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일 없는 안전한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의대생 최준서씨도 같은 집회에서 “성차별적 환경 속에서 청년 여성의 자살률이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다”며 “우파 집회는 차별금지법 반대 선동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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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진씨는 지난해 12월22일 남태령 비상행동 집회 무대에 올라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를 페이스북에 내걸었다”며 “윤 정부에서 노동자·여성·성소수자·이주민, 모든 약자의 삶이 하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11일 부산 서면에서 열린 탄핵 촉구 집회에서는 자신을 ‘노래방 도우미’라고 소개한 여성이 무대에 올라 쿠팡 노동자 사망, 동덕여대 시위, 장애인 이동권, 교제폭력 등 문제를 거론하며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난 다음에도 정치와 우리 주변의 소외된 시민들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다.
시민운동 주역 됐지만…여성·젠더 이슈 거리두는 정치권
응원봉을 들고 탄핵을 외치고 곳곳에 달려가 연대한 젊은 여성들은 그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꿔놨다는 평가를 받았다. 청년 여성은 ‘정치 무관심층’이라는 통념을 깼고, 남성 중심적이었던 노동·농민 운동 현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야권은 탄핵 촉구 집회에 쏟아진 젊은 여성들의 분노를 윤 대통령 탄핵의 주요 동력으로 삼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조기 대선 국면에 접어들면서 정치권 전반이 ‘여성·젠더 이슈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더불어민주당 인권위원장을 맡았던 주철현 의원은 지난달 24일 전남 당원들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에서 “차별금지법보다 먹고사는 문제가 우선”이라며 “민주당 차원에서 추진한 적은 전혀 없다”고 말해 논란을 빚었다. 민주당 의원들이 최근 국회에서 동덕여대 학생들과 기자회견을 열려다가 취소한 일도 있었다. 민주당이 ‘20~30대 남성 표심을 의식해 여성·소수자 이슈에 거리를 두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1월 7일 서울 용산구 윤석열 대통령 사저 인근에서 열린 윤 대통령 체포 촉구 집회 참가자가 생선 인형을 들고 있다. 이 참가자는 집에 응원봉이 없어 생선인형을 들고 나왔다고 말했다. 이준헌 기자
이런 모습은 정치권이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여성을 소환했다가 외면한 행태의 반복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민주당은 지난 대선·총선에서 20~30대 여성에게 호소해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22대 국회에서 여성 의제 관련 법안 발의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일례로 여성계의 숙원인 ‘비동의강간죄’는 22대 국회가 개원한 지 10개월이 지났음에도 관련 법안을 발의조차 하지 않았다.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입법 공백 상태인 낙태죄 보완 입법 역시 발의된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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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김지영 창원대 철학과 교수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자신을 ‘중도보수’라고 천명한 상황에서 여성·청년 정책을 얼마나 내세울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여성을 호명하고 외면하는 일이 반복됐을 때 청년 남성이 과대 대표되고 청년 여성은 소외되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여성 시민들 “광장 목소리 듣겠다더니…더 이상 지워질 수 없다”
여성들은 “더 이상 지워질 수 없다”며 정치권을 향해 “광장의 요구를 들으라”고 경고하고 있다. 꾸준히 탄핵 촉구 집회에 참여했다는 성윤서씨(23)는 “민주당은 ‘국민의힘 해산’을 말하고 있는데 광장에서 터져 나온 여성들의 요구를 듣지 않는다면 그간 여성을 배제해온 국민의힘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 송모씨(29)는 “수많은 청년 여성이 광장에 뛰쳐나왔는데도 여전히 정치권은 여성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있다”며 “지치지 않고 계속 목소리를 내서 대선 국면에서도 여성의 힘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인근에서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최한 ‘제40회 한국여성대회’가 열리고 있다. 이준헌 기자
여성 스스로가 정치권을 향해 소통 창구를 마련하라고 더욱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장은 “광장에 나온 여성들의 요구를 조직화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지만 정작 정치권은 여성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듣는 장조차 마련하지 않은 상태”라며 “청년 여성·페미니스트를 대변할 플레이어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국민의힘은 윤석열 정부의 반여성적 정책의 유산을 이어나가겠다는 태도이고, 민주당은 성별을 나눠서 정책을 만들지 않겠다는 입장으로 보여 우려스럽다”며 “여성의 요구를 정치적 의제로 만드는 것이 ‘청년 남성의 표를 버리는 것’이라는 인식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가령 성평등 임금공시제는 여성들의 요구이지만 세대별, 학력별, 직무별 임금 차별을 완화해 남성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 이예슬 기자 brightpearl@khan.kr 배시은 기자 sieunb@khan.kr 백민정 기자mj100@khan.kr 우혜림 기자 saha@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