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현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이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세종연구소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해체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지난 80년 동안 세계사의 흐름을 지배해 온 환대서양 동맹이 뿌리째 흔들리고, 자유세계를 이끌던 미국은 유엔 총회에서 러시아·북한·이란과 같은 편에 섰다.
이상현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지난 5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파국으로 끝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백악관 기자회견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면서 “트럼프가 당선될 때부터 예견된 일이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 취임 후 지난 50일 동안 펼쳐진 미국의 외교 정책을 두고 ‘돈과 힘이 지배하는 극단적 미국우선주의’ 외에 달리 표현할 말을 찾기 힘들다고 했다. 이 수석연구위원은 “트럼프가 한국만 예외로 봐줄 가능성은 없다”며 “한·미동맹도 예전 같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가치 동맹’ 기치를 앞세워 ‘한·미·일’ 대 ‘북·중·러’의 최전선을 자처했던 한국은 파도의 방향이 바뀌고 있는 와중에 조타수마저 잃은 채 표류하고 있다. 이 수석연구위원은 “가치 외교와 이념 외교를 혼동한 윤석열 정부의 반중 기조가 국민에게 확대재생산되고 있다”며, 다각도 외교를 펼쳐야 하는 상황에서 정치권의 이념적 대결이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수석연구위원은 세종연구소 소장, 외교통상부 정책기획관 등을 역임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앞으로 국제 질서가 어떻게 재편될까.
“트럼프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그린란드와 크름반도를 갈라먹는 식의 강대국 이익 연대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적어도 트럼프 4년간 미·러는 상호 이익의 영향권을 서로 묵인해주는 양상으로 갈 것으로 보인다. 다만 트럼프가 러시아를 이용해 중국을 견제하려 한다면, 그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중·러는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를 바꾸기 위해 ‘무한 협력’까지 운운할 만큼 높은 수준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에, 결국 트럼프가 푸틴 좋은 일만 시켜주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미·중 관계는 단기적으로 상당히 험악할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전쟁이 아닌 거래이므로, 중국으로부터 양보를 받아내고 타협할 가능성도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트럼프가 한반도와 대만을 놓고 거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그 속에서 한국은 어떤 외교전략을 펼쳐야 할까.
“트럼프가 한국만 예외로 봐줄 가능성은 없다. 한·미동맹도 옛날 같지 않을 거라 본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무역흑자 감축, 대중국 압박 동참 요구 등 조만간 청구서가 날아올 것이다. 미국에 핵우산 등 확장억제를 제공받는 한국 입장에서 (트럼프 요구를) 어느 정도 감수하더라도 한·미동맹을 유지해야 하는 건 맞다. 다만 이제 더 이상 동맹만 믿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유럽이 지금 왜 곤궁을 치르고 있겠는가. 미국의 안보 우산만 믿고 편하게 살다가 이 사태가 되니까 갑자기 국방 지출을 올리겠다고 하는데, 군사력이 하루아침에 강화되는 게 아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미동맹 그늘에서 오래 살다 보니 국가안보전략조차 스스로 세우는 연습이 안 돼 있다. 미국으로부터 오는 충격을 완화할 일종의 방파제를 구축하기 위해 한국과 유사한 입장에 있는 캐나다나 일본,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협력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 미국에 한순간에 내쳐진 우크라이나를 보면서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과 우크라이나를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순 없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이 아니지만, 한국은 미국과 동맹 관계다. 다만 백악관 기자회견을 보면서 뼈에 와 닿는 말이 있었다. 트럼프가 젤렌스키에게 ‘너에겐 카드가 없다’는 말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며, ‘그럼 우리에겐 무슨 카드가 있지’ 반문하게 됐다. 트럼프를 상대하려면 지금부터라도 더 많은 카드를 만들어 내야 한다.”
- 어떤 카드를 생각해볼 수 있을까.
“트럼프 2기에서도 여전히 미국 외교의 최우선 정책은 중국 압박인데, 이를 위해선 한국·일본 같은 동맹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대표적인 분야가 트럼프가 당선되자마자 언급했던 조선업이다. 현재 세계 조선업 1위가 중국인데, 바로 그다음이 한국과 일본이다. 또 미국은 방위산업 공급망이 없다. F-35 같은 첨단무기는 만들어도 대포탄 공급은 턱없이 부족하다. 지금 미국 동맹국 중 적시에 납기를 맞춰 방산 물품을 공급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과 호주 정도일 거다. 우리가 미국 군함의 주된 공급자가 되든지, 아니면 미국에 반도체 핵심기술을 제공하는 수출국이 되든지 해서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을 필요로 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미국이 압박해도 우리 나름의 이익을 챙기며 대응할 수 있다.”
-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의 ‘가치 외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걸까.
“트럼프 자체가 가치 외교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우리 외교 노선 수정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아무리 외교가 국익을 추구하는 것이라 해도, 일정한 가치는 분명 중요하다. 테러는 용인할 게 아니라 막아야 하고, 권위주의가 아닌 민주주의의 편에 서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추구하는 외교에 이미 국가의 정체성이 반영돼 있는 거다. 그런 측면에서 ‘글로벌 중추 국가 실현을 위해 자유민주주의 가치에 입각’하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가치 외교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가치가 아니라, 그걸 추구하는 방식이다. 윤석열 정부는 가치 외교와 이념 외교를 혼동한 게 아닌가 싶다. 가치를 이념화하면서 중국을 적대시하는 방향으로 갔다.”
- 그 여파로 탄핵 국면에서 반중 정서가 더 심해졌다.
“얼마 전 탄핵 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헌법재판소 쪽으로 행진하면서 ‘반중 멸공’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중국 시장 의존도가 높은 한국 같은 (중소) 국가가 미국과만 잘 지낸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잖나.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와도 관계를 복원해야 할 텐데, 가치를 너무 이념화·경직화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중국은 최근 무비자 정책을 비롯해 한국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많이 취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중국 내부의 사회적 불만을 무마하려면 경제성장이 중요한데 미국 견제로 수출이 막히고 있다. 중국으로선 주변 국가, 특히 한·일 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좋은 기회가 오고 있는데, 극우 쪽에서 반중 부정선거 음모론을 주장하며 찬물을 끼얹고 있다.”
- 트럼프가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추가 배치하거나 주한미군을 대중 견제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미 엘브리지 콜비 미 국방부 정책차관 후보가 미국은 중국 견제에 올인할 테니 동맹국들은 안보를 각자 책임지라고 말했다. 이는 주한미군도 대만 문제에 동원할 수 있다는 메시지다. 거기에 만약 한국군까지 끌어들이려 하면, 우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거다. 2017년 사드 배치 후 중국이 한국에 얼마나 보복했나. 롯데마트는 중국 시장에서 철수까지 했는데, 그때 미국이 (한국 보호) 조치를 별로 해주지 않았다. 주한미군과 사드를 중국 견제용으로 활용하려는 트럼프 정부의 압박은 최대한 버텨내야 한다.”

이상현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이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세종연구소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 러시아와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까.
“러시아가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하긴 했어도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격을) 상당히 자제해 왔다. 대러 관계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전쟁 이전으로 복원될 거라고 본다. 다만 관계가 복원돼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 주권을 침해한 것은 반대한다는 원칙은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런 원칙까지 포기하면 ‘한국은 과연 어떤 나라인가’라는 정체성까지 잃게 되는 거니까. 그런 측면에서, 최근 한국이 유엔 안보리에서 ‘러시아 침공’이 삭제된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 종전 협상이 마무리되면 트럼프가 북한으로 눈 돌릴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일단 우리가 북·미 간 직접 대화를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대화가 진행되는 한 김정은도 큰 도발을 하지 않는 것이 과거의 패턴이었으니까. 다만 지금은 오히려 북한이 느긋한 상황 아닌가 싶다. 트럼프 1기 때보다 핵·미사일 능력이 더욱 커졌고, 러시아의 식량 지원도 가능하니 쪼들리며 협상에 나설 이유가 없다. 트럼프가 큰 선물을 주지 않는 한 회담에 쉽게 응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나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 인정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만약 트럼프가 미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제거만 약속받고 한·일을 위협하는 중·단거리 미사일은 묵인할 경우 우리에겐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그 정도의 선물을 줄 가능성은 크지 않다. 주한미군 철수는 불가능할 거고, 핵보유국 인정도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하에서는 많은 나라가 반대할 거니까. 다만 트럼프가 예상 밖의 행동을 하기 때문에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을 것 같다.”
- 북·미 대화에서 한국이 ‘패싱’당할 우려도 크다.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이지만, 최소한 미국이 한국에 사전 혹은 사후 브리핑이라도 해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동맹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 미국이 북·미 협상에서 한국 의견을 반영해 줄지는 트럼프 마음이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그 사이에서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는 알아야 한다.”
- 자체 핵무장을 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안보 불안이 커지는 상황에서 이해는 한다. 문제는 그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 과연 우리에게 득이 되냐는 거다. 지금처럼 지정학적 리스크가 큰 상태에서 그다음 단계는 치열한 핵 군비 경쟁이 될 거다. 특히 항상 체제 위협을 느끼는 북한은 한국이 핵무장을 시작하면 더 좋은, 더 많은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이다. 이후 일본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로 핵무장이 퍼져나갈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거다. 모든 득실을 따져볼 때, 지금은 핵확산보다 군비 통제로 가는 방향이 맞다.”
- 이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헤쳐가야 할까.
“첫째는 자강이다. 군사력, 경제력, 소프트파워 등 모든 면에서 힘을 키워야 한다. 둘째는 연대다. 일본·캐나다 등 우리와 비슷한 체제와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협력해야 한다. 자강과 연대, 이 두 축으로 가지 않으면 미·중·러 같은 나라들을 상대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단합이다. 탄핵 국면에서 북한이 도발이라도 했다면 한쪽에선 온건·자제, 다른 한쪽에선 과잉대응을 요구하는 등 엄청난 혼란이 왔을 거다. 앞으로 (다각도 외교를 하려 해도) 정치권에서 분열된 목소리를 내면 그것이 또 국민에게 확대재생산 될 우려가 크다. 그러면 정말 힘들어진다. 지금은 국가를 빨리 정상화시킨 후 모두가 단합해 역량을 총동원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