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조홍민 논설위원

각본대로 흘러갈 것 같던 ‘탄핵심판 드라마’가 예상을 살짝 비켜갔다. 구치소에서 ‘대통령직 파면’ 통보를 받을 줄 알았던 윤석열이 풀려났다. 구속 기간 산정 문제로 석방됐을 뿐인데도 내란 우두머리는 개선장군인 양 득의양양했다. 웃음기 띤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고 간간이 주먹을 불끈 쥐거나 환호하는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탄핵 반대 세력은 ‘왕의 귀환’이라며 반겼다. 윤석열은 석방 직후 낸 메시지를 통해 “불법을 바로잡아준 재판부 결단”에 감사하고, “대통령의 헌법상 권한에 따라 공무를 수행하다 고초를 겪는 분들의 석방을 기원한다”고 했다. 위헌적 비상계엄으로 나라를 결딴낸 데 대한 사과는 없었다. 많은 시민은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이 모습을 바라봤다.

‘탄핵 드라마’의 얼개와 흐름은 생각보다 단순명료하다. 반전 요소가 중간중간 있을지언정 결국은 파면으로 결말 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윤석열은 자신의 통치 기반 강화를 위해 위법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계엄 선포의 기본인 국무회의 절차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명백한 내란죄 현행범이다. 계엄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범죄 사실이 사라진 건 아니다. 쟁점인 5가지 소추 사유를 따져봐도 그렇다. △비상계엄 선포 △포고령 1호 △국회 활동 방해 △군대 동원 선관위 압수수색 △법조인·정치인 체포 지시 등 쟁점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헌재가 중대한 법 위반으로 판단하면 탄핵 인용 판결이 나온다.

그런데도 윤석열과 그의 세력은 여전히 판을 뒤집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여당 정치인들은 너도나도 한남동으로 발길을 옮긴다. 벌써부터 ‘관저정치’에 시동을 걸었다는 얘기가 들리고 지지층을 향한 메시지를 통해 여론전을 이어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여당 의원들은 헌재 앞 릴레이 농성과 함께 탄원서를 내고 탄핵심판 각하·기각을 요구하며 헌재를 흔든다. 탄핵 반대 세력도 기세를 올린다. 거리를 메운 군중을 보고 탄핵 찬성 집회보다 많은 시민이 몰려나와 우리를 지지한다며 환호작약한다. 탄핵은 기각될 것이며 윤석열이 용산으로 돌아올 것처럼 떠들어대고 있다.

정말 궁금한 게 있다. 탄핵 반대 세력은 탄핵이 기각돼 윤석열이 용산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라 진심으로 믿고 있을까. 복수 관계자의 증언, 수사를 통해 밝혀낸 명백한 증거가 차고 넘치는데도 ‘계엄령’은 ‘계몽령’이고, 현 상황은 ‘내란몰이 프레임 공세’라고 주장하는 논리에 동조하고 싶을까.

헌재의 탄핵심판 선고가 임박하면서 찬탄과 반탄 진영의 긴장감도 높아지고 있다. 나라 전체가 어수선하다. 결과에 상관없이 유혈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우려마저 고조되고 있다. 더구나 윤석열은 단 한 차례도 ‘심판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말을 입에 올린 적이 없다. 그가 불복할 경우, 서울서부지법 폭력·난입 사태와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스스로 극우 집회에 참석해 어퍼컷 몇방 휘두르며 지지자들을 선동할 가능성도 있다. 국민의힘 대선 경선에 영향력을 행사해 정권 재창출 후 자신의 사면·복권을 꿈꿀지도 모른다.

미국의 교육신경과학 권위자 토드 로즈는 <집단 착각>에서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뇌는 우리가 집단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에 반응한다”고 지적했다. 그 믿음이 사실에 근거하는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다고도 했다. 우리를 무차별적으로 끌고 들어가는 지구의 중력처럼 군중과 함께하고자 하는 우리의 본성은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며, 이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고 인간은 여기서 탈출하는 게 불가능해 보인다는 게 로즈의 진단이었다. 문제는 이런 ‘집단적인 착각’이 나라의 명운을 나락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전의 내란을 제대로 단죄하지 못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지 않은가.

계엄의 겨울은 지나갔다. 위헌적 계엄 선포 후 펼쳐진 파란만장한 탄핵 드라마도 대단원의 막을 향해 치닫고 있다. 상식이 있는 시민이라면 헌재가 ‘윤석열 파면’ 이외의 결정을 내릴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100일 전 비상계엄은 헌법상 실체적·절차적 요건을 모두 갖추지 못했다. 무장 계엄군이 민의의 전당인 국회를 침탈하는 헌법 유린의 현장을 온 국민이 똑똑히 지켜봤다. 역사적 판단을 앞둔 헌재는 지금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고 있다. 헌재는 헌법 수호의 마지막 보루로서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할 의무가 있다. 민주주의의 봄이 가까워지고 있다.

조홍민 논설위원

조홍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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