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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계엄과 87년 체제

한국전쟁의 오랜 그늘에 갇혀온 한국 사회에서 군부 파시즘의 억압이 극에 달하자 민중은 6월 항쟁과 그해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저항했다. 그 과정의 세력 관계 변화를 배경으로 87년 체제가 등장했다. 87년 체제로의 이행은 구체제의 이완을 낳았다. 힘에 밀린 구체제 세력은 제도 정치 영역에서 민주당 계열의 집권을 허용하는 절충을 택했다. 불가능해 보였던 정권 교체는 1997년 외환위기 사태를 계기로 현실이 됐고 이후 10년간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과 남북 간 긴장 완화로 87년 체제는 안착에 성공했다.

그러나 87년 체제는 불완전한 승리의 소산이었기에 타협적이고 과도적이었다. ‘신식민지 파시즘’이라고 부르던 구체제의 이완도 전체 사회 구성을 이루며 접합된 하부 체제마다 양상이 불균등했다. 남북관계는 온탕과 냉탕을 오갔으나 국가보안법이 강제하는 한계는 역력했고 구체제 세력의 2008년 재집권을 계기로 다시 경색됐다. 노동 체제는 전노협과 민주노총의 출범, 해방 이후 최대 규모였던 1996년 겨울 총파업으로 상징되는 87년 체제 첫 10년의 계급투쟁을 거친 후 외환위기 사태로 신자유주의 전면화에 길을 내주고 말았다. 신자유주의의 극복을 위한 민주노조운동의 대항 담론 제시가 당시 미흡했던 가운데 노동과 자본 간 세력 균형이 무너졌다.

노동 체제에 있어 구체제 세력과 민주당 사이에 질적인 차이를 찾기는 어려웠다. 노동 유연화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외주화가 일상이 됐고 비정규직과 각종 불안정 노동의 사용이 확대됐다. 다만 한국의 신자유주의 노동 체제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초과 착취를 지속하려는 재벌과 제국주의 금융자본의 선택이었기에 역설적이지만 구체제로부터 물려받은 파쇼적 억압도 동시에 강화됐다. 노조의 단체행동에 공권력이 개입하는 가혹한 국가폭력 사례가 이어졌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노동기본권 사각지대의 무권리 상태에 고착됐고 노조 활동은 손해배상 가압류와 업무방해죄 적용으로 재갈이 물려졌다. 산업재해의 사망 대열은 끝이 없었다. 87년 체제의 민주주의도 공장 문 앞에서는 멈추었다.

세력 균형의 재편은 2016년 겨울의 일이었다. 개성공단 폐쇄, 철도 파업 진압, 민주노총 침탈, 양대 지침의 노동개악 등 박근혜 정권 공안 통치의 폭압이 극에 달하자 민중은 다시 촛불을 들었다. 수세에 몰렸던 노동이 반격을 재개했다. 광장에서는 ‘최저임금 1만원’ ‘재벌도 공범’과 같은 구호가 함께 울려 퍼졌다. 촛불의 신자유주의 반대 지향은 문재인 정권 초기 소득주도성장 시도로 연결되었다. 박근혜 탄핵이 초래한 잠정적인 역관계 변동 덕분이었다.

한편 구체제 세력은 한국 사회를 질식시켜온 극우 이념이 시민들 사이에서 점차 무력해지는 현상을 목도하면서 정치 자원의 재구성에 나섰다. 과거에 그들은 반공 교육, 교련, 관제 데모 같은 국가 장치를 이용해 시민들의 내면을 지배했지만 87년 체제에서 그런 통치는 불가능하거나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뉴라이트에 의한 역사 패러다임 재정립과 보수 개신교와의 재결합을 통한 우익 대중 동원을 대안에 포함시켰다. 멸공은 혐중으로 확장됐다. 구체제 세력의 새 정치 자원은 박근혜 탄핵 시점에 실체를 드러냈다.

촛불의 힘으로 바뀐 노동과 자본 간 세력 균형은 곧 다시 무너졌다. 문재인 정권은 광장에서 조기 철수한 뒤 개혁 실패로 구체제 세력에 정권을 내줬다. 윤석열 정권은 건폭 몰이 등 노동 탄압과 긴축 정책의 폭주를 거듭했고 남북관계를 87년 체제 이전으로 역주행시켜 전쟁 위기를 자초했다. 반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구체제 세력은 12·3 계엄을 통해 최종적으로 제도 정치 영역마저 87년 이전 질서로 되돌리려는 복고를 감행했다. 통합진보당을 강제 해산시킨 그들에게 다음 타격 목표는 민주당이었다. 12·3 계엄은 파시즘 정치의 논리적 수순이었다. 87년 체제를 지탱해온 불안했던 타협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2016년 겨울 촛불은 미완의 것이었다. 그 촛불이 이 겨울의 응원봉으로 부활했다. 광장의 요구를 모아낼 진보 정치는 이번에도 미약하고 촛불의 반대편은 그대로 응원봉의 반대편이 되었다. 그때도 오늘도 이 싸움은 87년 체제가 청산하지 못한 과거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과거의 사람들은 이 사회에서 오랫동안 다수였고 지금도 권력은 그들 것이다. 촛불에 패배했던 기억으로 이제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그들은 한국전쟁의 그늘에 스스로를 가둔 채 우리 시대의 불완전한 민주주의마저 회수하려 든다. 87년 체제가 백색의 공격에 파열되고 있다.

나원준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나원준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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