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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는 의존하는 자다

고대 로마 제국의 쇠망사를 쓴 한 역사학자가 로마 황제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우리는 황제라고 하면 무소불위의 최고 권력자를 떠올리지만, 실상 그의 권력에는 구멍이 많이 뚫려 있었다. 황제는 이론의 여지 없는 제국의 중심이었으나 현실적으로 그의 정치적 지배력은 중심부 언저리에서만 행사됐을 뿐 먼 지방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이는 제국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황제의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 중요했다.

물론 황제의 법적·이데올로기적 권력은 대단해서 무엇이든 황제의 손길이 닿는 것은 적법한 것으로 권위를 인정받았다. 사정이 그러하자 지방민들은 다투어 자진해서 황제의 권위를 요청했다. 그들은 사적 행동의 정당성과 사업의 합법성을 인가받기 위해, 또 다양한 특권과 혜택을 확보하기 위해 황제의 권위가 필요했다. 로마 제국에서 중앙과 지방은 그런 식으로 유착했다. 즉 황제와 중앙정부의 권력은 지방민들의 권위에 대한 요구에서 나왔다.

특히 황제의 ‘답서’ 제도가 흥미롭다. 이는 개인들이 황제에게 법률의 유권해석을 요청하는 제도였다. 파피루스 위쪽에 사연을 적으면, 황제가 그 아래쪽에 자신의 판정을 적어주었다. 황제는 그런 답신을 1년에 1000통 이상 썼다고 하니 얼마나 바빴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답서’는 황제의 손을 떠나면 멋대로 해석되었다. 황제는 숱한 청원에도 시달렸다. 황제가 일일이 사정을 알기도 어렵거니와 공정하게 처리할 수도 없었건만, 황제의 권위를 원하는 청원이 줄을 이었다. 이렇게 보면 황제는 아래로부터의 각종 민원에 시달리고 얽매인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현대 권력자의 경우도 유사하게 흥미롭다. 로마 황제 이미지로 즐겨 분장한 이탈리아 파시즘의 두체(Duce·지도자) 무솔리니는 전체주의를 표방하며 전례 없는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파시즘 연구자들은 무솔리니가 자기 수하의 지방 파시스트들조차 잘 통제하지 못했다고 본다. 지방의 호전적 파시스트들은 자신들의 폭력 행위를 두체의 권위로 포장하려 했는데, 이는 무솔리니에게 큰 부담이었다. 그는 고심 끝에 지방 파시즘이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타기로 했다. 지방 파시스트들은 무솔리니 없이 살 수 있었지만, 무솔리니는 그들의 동의 없이는 살 수 없었던 까닭이다.

물론 무솔리니의 개인 권력은 외견상 막강하여 말 한마디로 없던 것을 만들거나 있던 것을 없앨 수 있을 듯했다. 그런 만큼 숱한 민원이 두체에게 쇄도했다. 문서고는 억울한 사람들이 부당함을 바로잡아달라며 복직과 보상을 호소하는 투서들로 넘쳐났다. 두체도 로마 황제처럼 권력의 인증과 자비를 요구하는 끝없는 청원에 직면한 셈이다. 이런 시스템은 신뢰와 법치에 기초한 시민사회와는 무관하다. 그것은 친구와 적 사이의 불신과 암투로 점철된 일종의 궁정사회였다. 그런 사회라면 두체의 절대 권력도 투서에 담긴 이기적 욕망들에 포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파시즘이 목표한 전체주의 국가의 역설을 드러내는 연구가 많다. 전체주의는 공식적으로 ‘부분’에 대한 ‘전체’의 지배를 추진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부분’이 ‘전체’ 속으로 잠입해 ‘전체’의 힘으로 각자의 이익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과연 파시즘 시대에 다양한 기업과 이익집단이 국가를 활용해 이익을 극대화했다. 전체주의에서 ‘전체’는 ‘부분’의 필요에 지배된 것이다.

고대 황제와 현대 독재자의 역사는 권력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열어준다. 지배하는 자뿐만 아니라 지배받는 자도 권력을 필요로 한다. 권력자는 자신의 권위와 역량으로 서 있는 독립적 존재라기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와 요구에 종속된 자라는 것이다. 지배받는 자가 권위를 필요로 하지 않고 동의를 제공하지도 않는다면 권력자는 어떻게 될까? 이를 포르투갈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지배하는 자는 의존하는 자다.”

장문석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장문석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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