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희대 대법원장(가운데)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2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성폭력 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위법(강간 등 치상) 등에 대한 전원합의체 선고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성범죄를 저지를 목적으로 수면제를 먹여 의식을 잃게 했다가 성폭행은 미수에 그쳤더라도 강간치상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강간죄가 미수에 그쳤는지는 관계없이 그 과정에서 피해자를 다치게 했다면 일반 범죄보다 무겁게 처벌해야 한다는 기존 판례에 문제가 없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20일 성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강간 등 치상) 혐의로 기소된 A씨와 B씨에게 각각 징역 5년, 징역 6년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A씨와 B씨는 2020년 3월 서울의 한 주점에서 여성 두 명과 술을 마시다가 한 명이 먼저 귀가하자 혼자 남은 여성 C씨를 성폭행하기로 모의했다. 이들은 인근 편의점에서 구입한 숙취해소음료에 미리 가져온 수면제 졸피뎀을 넣고 C씨에게 마시게 한 다음 정신을 잃은 C씨를 인근 호텔로 데려갔다. C씨의 남편과 친구가 계속 전화를 걸면서 A씨와 B씨가 계획한대로 하지 못했지만 C씨는 일시적으로 의식불명 상태가 됐다. 이에 검찰은 A씨와 B씨를 특수강간치상죄로 기소했다.
강간치상죄는 ‘성폭행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상해를 입힌 경우’에 적용된다. 단순 강간죄보다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 피고인 측은 피해자가 다쳤다고 해도 정작 강간죄가 미수였기 때문에 강간치상죄도 미수범으로 보고 감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특수강간이 미수에 그쳤다고 해도 피해자가 상해를 입었으면 특수강간치상죄가 성립한다”는 대법원 판례에 따라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2심에서는 피고인들이 범행을 인정한 점,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점 등이 인정돼 1심(A씨 징역 6년·B씨 징역 7년)보다 형량이 1년씩 감형됐다.
A씨 등이 항소심 판결에도 불복하자 대법원은 이들을 ‘강간치상죄 미수범’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겠다며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회부했다.
이날 대법원은 10명의 대법관이 현재 판례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결과적 가중범(범행으로 중한 결과가 발생했을 때 형이 가중되는 범죄)을 가중처벌하는 근거는 기본 범죄에 내재된 전형적 위험이 현실화됐다는 점에 있다”며 “실행행위를 완료하지 않았더라도 이로 인해 형이 무거워지는 요인이 되는 결과가 생겼다면 이를 결과적 가중범의 기수범으로 처벌하는 것이 책임원칙에 부합하는 당연한 결론”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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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서경환·권영준 대법관은 “특수강간이 미수에 그친 경우와 기수에 이른 경우의 불법은 같지 않다”며 성폭행이 미수에 그쳤다면 강간치상죄도 미수로 보고 형량을 낮출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 유리하게’라는 형사소송법의 이념에 부합한다는 반대 의견을 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로 결과적 가중범인 특수강간치상죄의 미수범 성립을 부정하는 판례의 법리가 여전히 타당함이 확인됐다”며 “별도의 입법 없이 현행법 해석만으로는 특수강간치상죄의 미수범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