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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超人)과 비인(非人)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초인(超人)과 비인(非人)
주저앉는다
말뚝에 매인 염소처럼 도망치지 않는 돌계단은
주저앉기에 좋지

무엇을 잃어버릴 때마다
염소의 등짝 같은 돌계단에 앉아 생각한다

내려가는 중인지 올라가는 중인지

귀를 세워 듣는다
저 높은 곳에서 굴러 내려오는 불안한 숨소리
저 낮은 곳에서 걸어 올라오는 고단한 발소리

그사이
돌계단은 천천히 식어가고


어떤 결심이 근육을 팽팽하게 한다

돌계단이 구부리고 있던 무릎을 펴고 일어서면
나는 그 엉덩이를 때리며 말한다

가자고
까마득한 계단 저 높은 곳으로 아니면 저 낮은 곳으로
나를 태우고 가라고

결심을 경멸하면서
돌계단의 목덜미를 붙잡은
두 손은 놓지도 못하면서

- 시, ‘염소 계단’, 유병록 시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대한민국 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염소 같은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늘 상상을 뛰어넘는 몰상식과 무례함과 불공정을 일삼는 비인들에 맞서는 데에는 초인의 극기가 필수다. 대통령이란 자가 친위쿠데타를 도발한 지 108일째, 탄핵소추된 지 97일째다. 헌법 위반 사유는 차고 넘치지만 애타게 기다리는 탄핵 선고 소식은 없고, 나라가 백척간두인데 탈옥한 대통령은 김치찌개 타령이나 하고 있다. 오늘도 아닌가. 이번주도 넘기는 건가. 물처럼 순리대로 가라는 게 법(法)이라는데, 법을 도적질하는 법비(法匪)들과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빠져나가는 법추(法鰍)들을 봐온 국민들은 가슴이 답답하고 침이 마르고 잠이 안 오고 무릎이 꺾인다.

한껏 구부리고 있다가, “근육을 팽팽하게” 하는 어떤 결심 때문에 “말뚝에 매인 염소처럼 도망치지 않는” 광장으로 다시 올라간다. 광장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 함께 부르짖는 노래와 몸짓이 파도다. 수평이다. 평등이다. 펼치면 한없이 넓어지는 주름진 광장은 빼앗기고 불안하고 배회하는 존재들을 한 바다에서 솟구친 물방울로 만든다. 가까워진 포말은 부딪치고 겹치며 매번 다른 소리를 빚어낸다. 접촉은 서로의 얼굴을 읽게 하고, 서로의 목소리를 듣게 하며, 세계에 대한 감각을 바꾸어버린다. 무엇보다 우리는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걸 실감케 한다.

“귀를 세워 듣는다” “저 높은 곳에서 굴러 내려오는 불안한 숨소리”를. 일자리 없는 청년이 120만을 넘어간단다. 마이크로소프트와 SK, KDB산업은행과 크레인 너머 GS건설, 라이너 타워 같은 마천루에 에워싸인 스무 살, 서른 살 젊은 무릎들이 꺾이며 다시 일어선다. 빚더미에 눌려서, 어쩌면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을 떠안고 사는 사람들이 지천이란다. 광장에서 듣는다. “저 낮은 곳에서 걸어 올라오는 고단한 발소리”를. 자영업자 넷 중 셋이 한 달 수입이 100만원도 안 된단다. 광장은 거대한 허파, 공동의 심호흡을 통해 아직 이루지 못한 공동의 세계를 기필코 찾아낼 결심을 하게 된다.

경멸과 결심 사이 저 낮고 평평한 광장이 있다. 서로 인접하고 중첩된 울타리들이 걷히고 금이 무너진다. 장애인과 성소수자가 어깨를 겯고, 민주노총과 전농 사이에 청년들의 손이 얹힌다. 대동(大同)이다. 그것은 이 세계에 ‘몫 없는 자들의 몫’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돈의 척도로만 측정할 수 없는 세계의 지분 너머의 것을 요구하는 일이다. 돌계단 같은 광장에 앉아 생각한다. 곡기를 끊은 대한민국은 지금 “내려가는 중인지 올라가는 중인지”. 주질러앉아 있던 참을성 많은 “엉덩이를 때리며” 말한다. “가자고”. 저 핼쑥한 얼굴들 있는, “저 낮은 곳으로”.

김해자 시인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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