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사회심리학자 헤이르트 호프스테더는 조직과 국가 수준의 가치, 문화적 특징을 측정하고 유형화한 연구로 유명하다. 그는 세계 70여개국에 지사를 둔 글로벌 기업 IBM 인사관리 부서에서 일하며 각지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방대한 조사를 수행했다. 그는 동일한 규칙과 조직구조에도 불구하고 국가마다 직원들의 가치와 태도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고, 이후 심층 연구를 통해 집단이 공유하는 문화의 특징을 여러 차원으로 유형화했다. 그중 하나가 불확실성 회피(uncertainty avoidance)다. 이는 알려지지 않은 미래, 모호성에 대한 사회의 스트레스 혹은 관용의 정도를 의미한다. 불확실성 회피 지수가 낮은 사회일수록 사람들이 모호성에 잘 적응하고 익숙하지 않은 위험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직업을 바꾸거나 규칙이 정해지지 않은 활동을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인간의 삶에서 불확실성을 피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인류는 불확실성을 다루는 방법을 발전시키며 진화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테면 비가 많이 올지, 가뭄이 들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안정되게 농사를 짓기 위해 저수지와 수로 만드는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자연의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것이 기술이라면, 인간 사회의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해 발전시킨 것이 법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약속한 행동의 규칙이 있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규칙을 따를 것이라는 안정된 기대 속에서 우리의 사회적 삶은 유지될 수 있다. 도로에서 누구나 신호등 지시를 따를 것이라는 암묵적 동의가 있어야 혼란을 피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종교 또한 불확실성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중요한 장치다. 이는 초자연적인 존재의 힘을 빌리든 자기성찰을 통해서든,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견디게 해준다.
호프스테드의 분석에 의하면 한국은 불확실성 회피 성향이 높은 국가로 분류된다. 반면 덴마크나 스웨덴 같은 나라들은 불확실성에 대한 수용성이 높다. 학술적 엄밀성을 떠나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회안전망이 잘 갖춰지고 삶이 안정된 사회에서라면 미지의 도전도 해볼 만한 것이 되고 일시적 혼란도 견뎌볼 만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이 회복할 수 없는 파괴적 결과로 이어진다면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못 견디고 회피하려 할 수밖에 없다.
서울은 안전하다고 말했던 대통령이 알고 보니 이미 피란을 떠났고 한강 다리마저 폭파해 버렸다거나,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고 정부가 호언장담했는데 하루아침에 외환위기가 닥치고, 특별할 것 없는 수학여행과 핼러윈 축제에서 많은 이들이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던 경험들이 모여 우리 사회의 불확실성 회피 성향을 만들어냈을 것이리라.
난데없이 국회에 군인들이 몰려들고, 법 집행을 국가기관이 방해하고, 법원에서 백색테러가 일어나고, 아무에게도 적용된 적 없는 법 해석으로 내란 수괴가 구치소에서 풀려나는 사건을 잇달아 경험하고 나니 이제는 그 무엇도 믿을 수 없고 섣불리 예측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법과 종교는 불확실성을 대비하는 수단이 아니라 문제의 근원이 되고 있다.
작년 가을, 따뜻한 연말 분위기를 내보겠다고 베란다에 별 모양 장식 조명을 설치했다. 12월이 오기만을 기다려 겨우 두 번 조명을 밝혔는데 12월3일 밤 계엄이 터졌다. 별을 달았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지내다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날 모처럼 별을 밝혔다. 파면되는 날 한 번만 더 밝혀야지 생각하고 철거를 미루고 있었는데 벌써 3월 말이다. 이제는 별을 밝힐 수 있을지조차 의심하며 초조해하고 있다. 내가 기대하는 불확실성, 기꺼이 감내하고 싶은 모호함은 이런 게 아니었다. 우연히 들른 식당의 음식 맛은 어떨까, 이 산모퉁이를 돌면 어떤 경치가 펼쳐질까,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 나는 하루빨리 이런 소소한 모험과 도전을 즐기고 싶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