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커란 보통 컴퓨터 시스템과 프로그래밍에 대한 지식을 이용해 시스템에 침입, 정보를 빼내거나 시스템의 작동을 저해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해킹은 시스템에 대한 이해와 프로그래밍 기술, 그리고 고의가 결합한 전문적 행위다.
법체계 역시 컴퓨터 프로그램과 유사하다. 조문 하나하나는 프로그램의 코드들이고, 이 코드들은 논리적으로 발생 가능한 모든 경우를 아우르는 포괄성, 의미의 명확성, 그리고 다른 코드(조문)들과 논리적으로 일치하는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 조문이 미비하거나, 모호하거나, 다른 조문과 충돌할 경우 프로그램이 오류를 일으키듯이 그 법에 의존해 작동하는 국가 제도도 오류를 일으킨다. 법원이 처리하는 수많은 소송들 가운데 법리 다툼이 있는 소송은 바로 그 오류를 제거해 나가는 사회적 디버깅에 해당한다. 헌법재판은 가장 상위의 디버깅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오류는 ‘제도의 해커들’을 피해갈 수 없다. 시스템의 의도를 거스르거나 무너뜨리는 제도적 해킹은 늘 있었다. 미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투표권의 범위와 선거구를 교묘히 조정하는 투표 가치 해킹의 역사였다. 공공 조직들은 정권의 부적절한 인사를 통해 해킹당한다. 사법적 정의에 대한 저 유명한 ‘무전유죄 유전무죄’는 어쩌면 돈의 문제가 아니라 법을 해킹할 능력(혹은 그런 능력이 있는 변호사를 살 능력)의 문제이다. 조직의 허술한 창고에는 해킹에 능한 이들이 모여들어 규정의 약점을 악용해 제도의 취지에 반하는 이익을 취해간다. 이 사회의 불의에 저항하는 이들도 (많은 경우 실패하긴 하지만) 운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준법투쟁 같은 일종의 역해킹을 활용하기도 한다. 개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탈세는 범법이지만 기발한 방법을 동원하는 절세는 일상의 해킹이라 할 수 있다.
모두가 조금씩 해킹을 한다고 해서 모두 동일한 해커는 아니다.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는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에서 한 열쇠공의 이야기를 인용한다. “세상 사람들 중 1%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지요. 또 1%는 어떻게든 자물쇠를 열어 남의 것을 훔치려 합니다. 나머지 98%는 조건이 제대로 갖춰져 있는 동안에만 정직한 사람으로 남습니다.” 98%에 속한 이들도 조건에 따라 소소한 해킹을 하며 산다. 하지만 어떤 이들, 특히 권력자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의도적으로, 악의적으로 해킹을 한다. 때로 권력은 해킹을 위한 자원이자 해킹의 결과다.
지난 12·3 이후 시민들이 지치고 절망하고 분노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국법 체계가 집요하게 해킹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헌재의 시간’이라는 말이 함축하듯 시민적 행동의 한계를 절감하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컴퓨터가 해킹당하고 있는 화면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절차의 중요성 모두 안다. 그러나 권한대행의 탄핵 정족수 문제부터 시작해 헌법재판관 임명 의무, 공수처 수사권, 법원 관할권, 구속기간 산정 문제까지, 상식에 의존하는 일반 시민들 입장에서는 저런 것까지 문제가 되는지, 지금 저것이 문제의 핵심인지 의문이 드는 절차적 이슈들이 점입가경으로 쏟아져 나왔다. 제도의 해커들에 대응하는 ‘프로그래머’들이 백신 논리를 개발하고 있지만, 이들 간의 싸움은 검도 고수들의 대련처럼 평범한 시민들에겐 어렵기에 민주주의의 관점에서는 씁쓸하다.
“법대로 하자”는 오랜 표현이 무색하게 이제는 도대체 의미가 분명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법이라는 것이 한 조문이라도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든다. 아니, 어쩌면 이제야 깨닫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원래 실정법이란 그러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민주공화정의 시민으로서 선을 넘지 않아왔을 뿐이지 실상 모든 것을 다퉈볼 수 있다는 사실을. 제도의 불비를 짜내고 짜내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1%의 해커들이 위험한 것은 98%의 ‘정직한 사람들’에게 선을 넘어오라고 손짓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언론과 개인 미디어를 활용해 결국 사람들의 마음까지 해킹한다. 이들은 단순하게 우리가 무언가를 믿도록 성급하게 해킹하지 않는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확인하는 메타 인지의 영역을 먼저 해킹한다.
시민들은 해킹으로 멈춰버린 모니터 앞에서 복잡한 마음을 곱씹으며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은 견딜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이 법치임을 안다. 마음을 부수는 것은 시스템의 결함이 아니라 그 결함을 후벼파는 해커들로 누더기가 되어가는 시스템의 모습이다. 그것은 법치가 아니다.

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