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1일 서울 종로구 연합인포맥스 화면에 한화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주가가 표시돼 있다. 연합뉴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등 국내 증시 대표 기업의 대규모 유상증자로 투자자들의 국내 증시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고 있다. 다른 자금조달 대안이 있는데도 지배주주가 주주가치를 희석할 수 있는 유상증자 카드를 먼저 꺼내든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도 포함시킨 상법 개정안 발효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23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한화에어로스페이스(한화에어로)는 지난 21일 전장보다 13.02% 떨어진 주당 62만8000원에 장을 마감했다. 지주사인 (주)한화(-12.53%), 한화시스템(-6.19%) 등 한화그룹주도 무더기로 급락했다.
주가 급락 요인은 지난 20일 발표된 한화에어로의 대규모 유상증자안이다. 한화에어로는 국내외 방산시설 확충 등 대규모 투자 자금 마련을 위해 전체 발행주식의 13.05%에 해당하는 보통주 595만500주를 유상증자하겠다고 밝혔다. 예정발행가액은 할인율 15%를 적용한 주당 60만5000원(20일 기준)으로, 한화에어로는 이번 유상증자로 약 3조6000억원을 조달하게 된다. 국내 증시 유상증자 중 역대 최대 규모다.
한화에어로는 이번 유상증자를 통한 투자로 향후 10년 뒤 영업이익 10조원을 달성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놨지만 투자심리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15% 낮은 가격으로 대규모 신주가 발행되면서 주주의 지분가치가 크게 희석(지분희석률 11.5%)된 데다 시장도 유상증자의 적정성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금조달 방식 중 하나인 유상증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한화에어로의 전망대로 이번 유상증자를 기반으로 한 투자가 성과를 내면 중장기적으로 주가가 크게 오를 수 있다.
문제는 ‘성의’다. 현금흐름도 안정적이고 차입 여력도 충분하다면 주주가치에 역행할 수 있는 대규모 유상증자를 하지 않고도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유상증자는 다른 수단을 쓰고도 자금조달이 필요할 때 이용할 ‘마지막 카드’라는 것이다.
한화에어로는 충분한 여력이 있는데도 주주에게 부담을 주는 유상증자 카드를 먼저 꺼냈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유동 교보증권 책임연구원은 “지난해 기준 영업활동 현금흐름이 1조4000억원 수준에 달해 3~4년에 걸쳐 집행될 필요 자금을 굳이 유상증자를 통해 조달하기로 한 건 아쉬운 결정”이라고 밝혔다.
한화에어로가 최근 한화오션 지분 인수에만 1조3000억원을 투입한 것을 두고 지배주주의 지배력 확대에만 회사 현금을 쓴다는 비판도 있다. 이번 지분 인수로 그룹사에 대한 총수 일가 지배력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변용진 iM증권 연구원은 “역대 최고 수준의 주가를 활용해 유상증자를 한 만큼 주주 이익보다는 부채비율 최소화, 이자 비용 절감 등 회사 이익을 우선시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 14일 기존 발행주식 수의 약 17% 규모로 2조원대 유상증자를 단행하겠다고 밝힌 삼성SDI 역시 자산 매각 등을 통해 투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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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증자를 둘러싼 우려가 커지자 삼성SDI와 한화에어로 임원진 모두 책임경영 차원에서 주식 매입에 나섰다. 김동관 한화에어로 전략부문 대표이사를 포함한 경영진은 이날 48억원의 주식을 매입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국장(국내주식)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엔 역부족이란 지적이 나온다. 온라인 종목토론방에선 ‘눈 가리고 아옹’ ‘이런데도 상법 개정을 반대하느냐’ 등의 반응이 보였다. 이사의 충실의무를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이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 없이 공포될 경우 이 같은 유상증자가 이사회에서 승인되기 어려울 수 있다. 강진혁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상법 개정을 앞두고 대규모 유상증자가 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투자자들의 실망감이 가중됐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