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유일 강대국이 있다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그건 냉전 종식의 산물이다. 결국에는 다극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중국, 러시아, 북한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1월 취임 직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 전 의회 청문회 모두발언에서는 “미국이 먼저 안전해지고 강해져야 세계 평화·동맹에 기여할 수 있다”고 했다. 미국은 여러 강대국의 하나일 뿐이다, 세계 정부 역할을 할 능력도 의사도 없다, 그러니 미국에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다.
솔직하다. 루비오가 말했다. “저는 많은 경우 외교가 아무 의미 없는 상투적인 문구와 언어를 쓰는 것보다 솔직할 때 더 잘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도널드 트럼프가 그렇게 해서 조기 성과를 거두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트럼프는 “미국이 돌아왔다”고 했다. 조 바이든도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같은 말을 했다. 떠난 미국은 무엇이며, 돌아온 미국은 무엇인가?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미국의 힘이 약해진 때문이지만, 그게 필연적인 결과는 아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국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신호가 나올 때 미국은 세계 없이 홀로 성공할 수 없고, 세계도 미국 없이 성공할 수 없다며 다자협력을 강조했다. 트럼프는 그때보다 약해진 미국을 끌고 홀로 가겠다고 한다. 루비오는 그게 고립주의를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맞다. 우크라이나 광물협정, 그린란드 매수, 멕시코만 명칭 변경, 파나마 운하 운영권 인수 추진은 고립주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미국이 80년간 세계 질서를 지키느라 뿌린 것을 수확하겠다는 마당에 홀로 갈지언정 세계로부터 떠날 수는 없다.
트럼프가 잘해낼 수도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결속한 중·러·북 관계를 이완시킬 수 있다. 러시아가 미국과 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고 판단하면, 대중 접근을 조절할지 모른다. 중·러 협력은 공고하지 않다. 중·러는 유라시아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다. 북·러 동맹도 약화시킬 수 있다.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에 북한은 작아 보일 것이다. 러시아가 미국, 한국을 포기하고 북한을 선택할 전략적 이유가 없다. 미국은 북한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포기를 협상할 수도 있다. 북한이 포기하면 미국이 한국에 제공하는 확장억제력의 신뢰 수준이 높아지므로 북핵 위협을 낮추는 효과를 낼 수 있다.
트럼프는 러·우 종전으로 유럽에 평화를 선물할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는 전쟁에 이길 수 없고, 미국은 전쟁 지속 의사가 없고, 유럽은 미국 대신 전쟁할 능력이 없다. 우드로 윌슨 전 미국 대통령이 “정의가 평화보다 소중하다”며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한 것은 ‘힘 있는 정의’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정의 없는 평화’가 불가피하다. 전쟁, 끝내야 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를 모욕하고, 유럽을 배제한 채 러시아에 유리한 종전을 하는 방식으로는 평화가 아니라, 취약국의 영토를 차지하려는 유혹을 부추길 수 있다. 동맹관계도 그렇다. 트럼프 외교의 배경인 현실주의는 동맹을 필요로 하지만, 트럼프가 생각하는 동맹의 쓸모는 다르다. 루비오는 청문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핵심 국익보다 (자유주의) 세계 질서를 우선시하는 동안, 다른 국가들(동맹)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 그 때문에 “세계 질서가 우리를 공격하는 무기”로 변질됐으니, 미국도 다른 국가처럼 “핵심 국익을 최우선시해야 한다”.
트럼프 관점에서 적대국은 미국의 국익을 착취할 기회가 없었지만 유럽, 동맹은 그렇게 했다. 트럼프 국익전쟁의 주 전선이 적대국이 아닌, 동맹인 이유가 여기 있다. 독재정권을 전복해서라도 민주주의를 이식하려던 네오콘의 정권교체론을 반대한 트럼프가 정작 영국, 독일 같은 동맹국의 정권교체를 시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트럼프가 동맹을 착취하며 국익을 추구할수록 중국에 활로를 열어주고 러시아에는 제국의 꿈을 심어줄 수 있다. 트럼프 역설이다.
세계는 지금 단극, 양극, 다극 체제도 아닌, 과도기에 놓여 있다. 모든 곳에 있던 미국은 어디에도 없다. 미국은 오직 미국 안에 있다. 미국의 부작위가 만들어낸 질서 아닌 질서는 강력한 지도자의 의지에 휘둘리는 권력정치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이미 열었는지 모른다. 국제관계 현실주의 시조인 한스 모겐소가 말한, ‘권력으로 정의되는 국익’을 추구하는 시대의 주인공은 트럼프, 시진핑, 푸틴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안정적인 국제 질서가 사라진 그들의 세계를 살아야 한다.

이대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