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25일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에서 마이크 던리비 미국 알래스카주 주지사와 면담을 갖고,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 등 에너지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촉발한 관세전쟁 대응 방안을 고심 중인 정부가 미국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사업 참여를 저울질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과 일본을 거명하며 사업 참여를 요구해온 만큼 당장 소나기를 피할 협상 카드는 될 수 있다. 그러나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데다 중국과 엑손모빌 등이 발을 뺀 전례를 볼 때 사업 전망이 불투명해 보인다는 점이 문제다. 정부는 일단 공식적으로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되 참여 가능성은 열어놓는 모호성 전략을 취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의 31조원 대미 투자에 이어 알래스카 LNG 사업 참여까지 얹은 ‘패키지’가 만들어질지 산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25일 산업통상자원부는 안덕근 장관이 한국을 방문한 마이크 던리비 미 알래스카 주지사를 만나 LNG 프로젝트를 비롯한 에너지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전날 2박3일 일정으로 한국에 온 던리비 주지사는 이날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와 김동연 경기도지사, 조셉 윤 주한미국대사대리, 세아그룹 경영진과 회동했다. 26일엔 SK·포스코·한화 최고 경영진과 최연혜 한국사스공사 사장과 회동할 예정이다. 산업 관련 국내 고위관계자는 물론 에너지·인프라 분야에서 역량이 있는 한국 기업과 접촉해 투자를 유인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일정에서 나타나듯 던리비 주지사의 방한 목적은 분명하다. 한국 정부와 기업들을 설득해 알래스카 LNG 사업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앞서 지난 4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재집권 후 첫 의회 연설에서 “우리 행정부는 알래스카에서 거대한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고 있다”면서 “일본, 한국 그리고 다른 나라들이 수조달러씩 투자하면서 우리의 파트너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업 참여를 사실상 ‘요구’한 것이다.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는 미국 알래스카 북단의 프루도베이의 가스전에서 채굴한 천연가스를 1300㎞에 이르는 수송관으로 운송해 액화한 뒤 수출하는 사업이다. 상업화에 성공한다면 연간 LNG 생산량이 2000만t에 달하는 데다 한국·일본의 경우 운송 경로가 대폭 단축된다는 장점이 있다. 미국의 걸프 연안에 집중된 LNG 수출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물량의 경우 파나마 운하를 거쳐 한국·일본까지 도달하려면 3주~1개월가량 소요되지만, 알래스카 남단에서 출발하면 1주일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알래스카 가스라인 개발(AGDC)이 밝힌 사업 규모는 64조원(440억달러)에 이른다. 혹한의 기후를 뚫고 1300㎞의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사업비가 더 불어날 가능성도 있다. 굴지의 에너지 기업인 엑손모빌, 브리티시페트롤륨(BP), 코노코필립스가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2016년 철수한 이유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1기 때도 이 사업을 밀어붙였는데, 중국이 미·중 무역분쟁 과정에서 미국을 달래기 위해 참여를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중국 역시 수년 뒤 참여 의사를 철회했다.
불투명한 사업 전망을 생각하면,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대만, 일본이 잇따라 이 사업에 대한 참여·투자를 약속하면서 한국 입장이 난처해졌다. 지난 21일 던리비 주지사가 대만을 방문한 시점에 대만 국영 석유기업인 대만중유공사(CPC)는 알래스카 가스라인 개발과 LNG 구매·투자의향서를 체결했다. 일본 역시 지난 2월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방미 때 사업 참여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힌 바 있다.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 자체가 사실상 한국·대만·일본의 LNG 시장을 염두에 둔 사업이란 분석이 나온다. 동아시아에서 이 사업의 참여는 트럼프 행정부가 원하는 대로 협상 패키지의 ‘기본값’이 될 가능성이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압박과 대만·일본 사례에 휘둘리지 말고 경제성을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노남진 에너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이 프로젝트에 소요되는 비용은 크게 세 가지다. 천연가스 채굴에 드는 비용, 1300㎞에 이르는 파이프라인를 구축하는 데 드는 비용, 액화 터미널 건설에 소요되는 비용”이라며 “이 비용을 모두 산출해보고 나중에 그만큼의 투자금을 회수할 만한 천연가스 가격이 형성될지를 신중하게 가늠해야 한다. 아울러 알래스카 주정부나 미 연방정부에서 어떤 지원책을 내놓고 있는지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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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정책위원은 “알래스카 LNG 사업에 정부와 기업들이 천문학적 투자를 하게 된다면 국내 재생에너지 투자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면서 “중국이 전기차와 재생에너지 분야에서 선도적 위치를 굳혀가는 상황에서 미래산업이 아닌 향후 좌초자산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업에 투자하는 게 바람직한지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만은 ‘제2의 우크라이나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 안보 측면에서 결정한 것이고 일본은 전통적인 천연가스 기업들이 많아 그런 측면이 영향이 미쳤을 수 있다. 우리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조급해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던리비 주지사의 구애를 받고 있는 기업들도 썩 달가워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던리비 주지사와의 만남이 예정된 한 대기업의 관계자는 “알래스카 사업이 수익성이 좋다면 미국이 벌써 다 투자했지, 다른 나라에 투자해 달라고 하겠느냐”면서 “사업성이 좋아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알래스카의 파이프라인 건설에 쓰이는 철강의 경우 25% 관세가 면제될 수 있다는 미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철강업계에선 파이프라인 기자재 공급에 따른 수익성 등에 대해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