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정점식 국민의힘 의원(왼쪽)과 박홍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오른쪽)이 각각 대통령 윤석열 탄핵 반대와 파면을 촉구하는 피케팅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헌재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겨울도 봄도 아닌 3월의 시간처럼 한국 사회는 예상치 못한 ‘가치 전도’의 음울한 계절을 견디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선과 악의 판단 경계도 흐릿해진다. 공동체가 최소한으로 공유한다 믿었던 가치들의 앞날은 황사 낀 봄날처럼 뿌옇다.
보수의 일각일지언정 ‘비상계엄은 쌍방 과실’ 같은 주장이 횡행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지난 18일 유튜브 방송에서 “뜬금없는 (비상계엄) 결정도 잘못이고 야당도 그런 결정을 하게끔 얼마나 정부를 못살게 굴었나”고 했다. 그래서 결론은 “둘 다 잘못”이란다. 어느 보수 신문 칼럼은 계엄이 대통령 윤석열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연대해서 책임져야 할 사안”이라고 한다. 대통령 탄핵을 폭행 사건의 시비를 가리고, 교통사고 보험 책임을 다투는 일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윤석열이 사고친 김에 눈엣가시 같은 이 대표까지 쓸어내고 싶은 속마음이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뻔뻔함에도 지킬 선은 있다. 그나마 법원이 26일 선거법 위반 2심에서 이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했으니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 되게 생겼다.
가치 전도의 가장 심각한 병증은 ‘악’의 정도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양비론’이라 하는데, 악의 경중을 흔들어 심하면 역전시키고, 원인과 결과를 뒤섞어버린다. 종국에는 그 악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무화(無化)하는 것을 노린다. 이때 양비론을 균형처럼 착각하도록 포장할 수 있다면 기술적으론 최고봉이다. 균형은 정치적으로 공정하려는 것이다. 성립 요건은 선악의 무게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이다. 이것이 균형에 원칙과 권위를 부여한다. 양비론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양비론이라고 다 같지 않다. 소위 ‘기계적 균형’이 악의 무게를 제대로 달지 못한 ‘순진한 바보’들의 양비론이라면, 문제가 되는 것은 처음부터 작정한 ‘설계된 양비론’이다. 이 사악한 양비론은 ‘공정’은 관심 밖이고, 어떤 정치적 입장을 공격하고 방어하려 ‘악의 차원’을 흐리는 게 목적이다. 악은 모두 악일 뿐 다름이 없다고 한다. 같은 악이니 구분 없이 성찰을 강요한다. 그러다보면 양비론 위선자들이 노리는 바대로 악에 무감각하게 된다. ‘쌍방 과실 계엄’은 이런 구조에서 나온다.
양비론 판을 깔고 점점 내면화하다보니, 계엄 망동은 애국적 행위로 돌변한다. 탄핵 초기만 해도 “비상계엄은 잘못”이라던 국민의힘은 이제 “나라를 살리는 계엄”에서 “(계엄은) 미래를 향한 개혁”으로까지 표변했다. 권력에 아부하는 황당무계한 ‘용비어천가’는 역사를 통해 수없이 들었지만, 이처럼 악행을 180도 역변시켜 미화하는 악의 찬가는 듣도 보도 못했다. 60여년 전 총칼로 권력을 점령하고 시민을 억압하던 독재의 언어와 ‘악’의 부활을 목도하게 된다.
악에도 차원이 있다. 약자를 등치는 고리대금업자 노파의 죄와 그 노파를 살해한 라스콜니코프의 죄가 동일하다 할 수 있는가. 노파의 악이 불평등한 사회에 만연한 악이라면, 살인 행위는 인간성 자체를 파괴하는 악이다. 정치를 황폐하게 만드는 데 영향을 준 ‘절반의 잘못’과 3권 분립을 파괴하고 국민 기본권을 강탈하려던 악이 같을 수는 없다.
악을 더 큰 악으로 징치한다는 일 자체가 애당초 스스로마저 속이는 거짓이다. 살인을 초인의 행위로 합리화했지만, 결국 노파의 재산이 필요했던 라스콜니코프처럼 악행의 심연 속엔 사적인 탐욕이 있기 마련이다. 온 천하가 야당의 줄탄핵과 예산 삭감에 대한 “경고성 계엄”이라는 새빨간 거짓말을 비웃으며, 윤석열이 자신의 치부가 탄로날까봐 부린 망동으로 짐작하는 이유다.
가치 전도는 공동체의 윤리 기반을 허무는 중병이다. 국가와 사회의 정체성을 암종으로 뒤덮어 죽음에 이르게 한다. 악의 차이를 인식하지 않을 때 나치의 홀로코스트처럼 죄의식 없이 명령에 따르는 ‘평범한 악’들도 가능하게 된다. 양비론은 이처럼 인간 양심마저 파괴한다. 마음들이 뚝뚝 피 흘리던 계엄의 그날 밤 절규하며 일어섰던 시민과 군인들의 그 양심이 지금 피를 토하고 있을 것이다.
‘계엄 양비론’을 절대 허용해선 안 되는 것은, 그 악에 결국 우리 모두가 희생될 것이기 때문이다. 양비론의 당사자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 괴물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나치를 세상에 꺼낸 것은 바이마르의 혼돈이 아니라, 악의 차원을 구분하지 않은 교활함이다. 우리 본성이 ‘악’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양비론은 용납되어선 안 된다. 존엄한 인간의 자존심이다.

김광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