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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봄볕

[김범준의 옆집물리학]봄날의 봄볕

내가 사는 수원에는 ‘인문 공동체 책고집’이 있다. 책고집 대표 최준영 선생님은, 노력하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우리 사회의 구석진 그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인문학의 가치를 알리려 꾸준히 고집스럽게 애써온 이다. 올해 책고집은 ‘인문학 강좌, 곁과 볕’을 전국 곳곳에서 진행한다. 얼마 전 강사로 참여하는 분들을 만나는 자리가 있었다. 글과 삶의 모습을 보며 늘 존경하던 한 분이 ‘곁과 볕’이 ‘곁과 빛’이었다면 이 자리에 오지 않으려 했다며 좌중을 웃게 만들고는, 곧 사람의 온기를 전하는 것은 빛이 아니라 볕이라는 의미 있는 얘기를 이어갔다.

봄이 오고 있다. 미세먼지로 탁한 봄 하늘을 눈곱 낀 듯 아스라한 시선으로 가만히 올려본다. 밝아진 햇빛이 겨울과는 분명히 다르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고재현 교수님의 책 <빛의 핵심>에 따르면, 태양 깊은 안쪽에서 출발한 빛은 100만년의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태양 표면에 도달한다. 이곳에서 빛은 빼꼼 고개를 내밀고, 곧 걸음을 재촉해 우주 공간을 빠르게 가로질러 지구의 대기를 통과한다. 전자기파인 빛은 내 얼굴에 닿아 가지고 있던 에너지를 흔쾌히 내놓고, 몸을 이루는 입자들의 마구잡이 열운동을 늘려 내 피부의 온도를 높인다. 바로 이때 빛이 볕이 된다.

보낸 것은 빛인데 닿고 보니 볕이 된 따사로운 봄볕에서, 빛이 볕이 된 100만년을 생각한다. 빛은 눈이 보고 볕은 몸이 본다.

촛불도 빛을 낸다.

우리 주변 대부분의 연소 반응은 물질에 들어 있는 탄소가 공기 중 산소와 결합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탄소와 산소가 따로 있을 때의 전체 에너지는 둘이 한 몸이 되었을 때의 에너지보다 더 크다. 둘은 한 몸이 되면서 에너지를 절약하고 남긴 에너지를 빛의 형태로 외부로 방출한다. 멀찍이 따로 선 둘이 한자리에 모여 하나가 되니 뭐라도 함께 베풀 것이 더 생긴 모양새다. 가만히 타는 촛불을 보며 함께하면 그나마 뭐라도 더 할 수 있는 세상사를 떠올린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은 낮은 곳에 있을 때 중력 에너지가 더 작기 때문이다. 낮아지며 줄어든 만큼의 에너지가 물레방아를 돌리고 수력발전소의 전기를 만든다.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자연은 에너지가 줄어드는 방향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탄소와 산소가 만나 한 몸이 되는 연소 반응이 그냥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멀찍이서 서로 외면하던 탄소와 산소가 하나로 만나려면 먼저 에너지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데면데면한 둘 사이 에너지 장벽을 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로 우리는 성냥의 불꽃을 이용한다. 펌프에서 물을 끌어 올릴 때 처음 한 바가지 마중물이 필요하듯, 성냥의 불꽃이 마중물이 되어 초의 첫 연소 반응이 시작된다. 그다음은 고개 없는 내리막이다. 처음의 연소에서 방출된 에너지의 일부가 전달돼 다음 연소 반응이 일어나고, 이때 방출된 에너지가 그다음, 또 그다음 연소로 이어진다. 꺼진 촛불 백날 쳐다봐야 고개만 아프지 저절로 불붙을 리 없지만, 누군가 작은 성냥불로 불붙이면 커다란 장작도 오래 탄다. 활활 타는 큰 장작불을 떠올리며 처음 불붙인 작은 불씨를 생각한다.

사람도 빛을 낸다. 가시광선 영역이 아니어서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적외선 카메라로 보면 사람이 내는 빛을 볼 수 있다. 사람이 빛나는 이유는 몸의 온기 때문이다. 자연의 모든 따뜻한 것은 스스로 다양한 파장의 빛을 낸다. 사람 몸의 온기가 빛과 열로 퍼져나가고, 누군가에 닿으면 이것도 볕이 된다. 아무리 추워도 여럿이 함께 한자리에서 가까이 모이면 훈훈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유다. 너는 빛을 보냈는데 내가 받고 보니 볕이 되는 놀라운 일이다. 차갑게 느껴지는 빛은 있어도 따뜻하지 않은 볕은 형용모순이다. 세상의 온기를 전하는 것은 빛이 아니라 볕이다.

봄이 왔는데 봄 같지 않은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봄빛은 완연한데 따스한 봄볕은 느껴지지 않는다. 해가 보내는 봄빛이야 1년을 주기로 규칙적으로 반복되니, 빛을 기준으로 하는 봄이 때맞춰 우리를 찾아오지 못할 도리는 없다. 빛을 볕으로 만드는 것은 태양이 아니라 우리라는 것을 떠올린다. 봄이 왔는데 봄 같지 않은 이유는 빛이 아니라 볕의 문제가 아닐까. 지난해 12월 초 시작한 한국 사회의 긴 겨울이 곧 끝나기를 바란다. 밝은 봄빛이 봄날의 따스한 봄볕이 되기를. 춘분을 훌쩍 넘겼는데도 아직도 오지 않은 봄볕이 곧 우리 모두를 찾아오길.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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