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끝에는 무리 지어 나는 새들과 함께 걸었다. V자를 그리며 비행하던 새들은 만경강 주위를 몇번씩 돌았다. 떠나기 전 비행 연습이자 집단 결속의 몸짓이라지만 사람의 눈에는 영락없는 작별 인사로 보였다. 며칠 전에는 무리에서 낙오된 세 마리의 새를 봤다. 그게 마지막이었을까. 이제 철새가 보이지 않는다.
만경강은 철새들의 겨울 집이다. 겨울에는 사람보다 새가 많고, 사람보다 새가 더 크게 운다.
산책길에 반려인에게 “새가 운다”고 했더니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모국어, 프랑스어에서 새는 울지 않는다. 지저귀거나 노래하거나 짹짹거릴 뿐이다. “새가 운다는 표현은 너무 불길한 거 아니야?” 반려인이 물었다. 새의 울음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울음에 담긴 슬픔과 그리움은 새의 것이 아니라 이 땅을 밟고 사는 인간의 것일 테지만, 만경강의 새들은 정말 우는 것 같다. 일제의 간척 사업과 수로 개발로 물길을 잃었을 때, 홍수 피해를 본 농민들이 땅을 떠났을 때, 피란 중에 강을 건너던 이들이 시신으로 돌아왔을 때, 새들이 울지 않았겠는가. 실제로 새들은 상황에 따라 다른 음조로 소리를 낸다고 한다. 짝을 부를 때와 영역을 지킬 때 내는 소리가 다르듯이 철새가 떠날 때 내는 소리가 있다. 만경강의 기억을 두고 가는 이의 마지막 소리. 내 귀에는 영락없는 울음으로 들린다.
만경강에서는 누구나 탐조인이 된다. 고급 카메라 같은 장비가 없어도 작은 수첩 하나면 충분하다. 머리가 청동색인 새, 몸이 검은 오리, 부리가 길고 끝이 노란 새. 새의 특징을 기록하고, 그것을 토대로 이름을 찾아내면 숨은 주민들을 만난 것 같아 반갑다. 어떤 날은 멸종 위기 새를 발견하고 혼자 비장해진다. 사라지는 것의 마지막 목격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목격자의 역할은 증언이고, 증언은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과 존재를 밝힌다. 호남 땅의 목격자, 만경강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 강은 얼마나 오래 이 땅에서 피고 지는 것들을 목격했을까? 강의 시간을 생각하면 강에서 부는 바람도 하나의 언어처럼 들린다. 바람에 억새가 쓰러지고 새들이 마지막 비행을 할 때, 수천 년의 이야기를 담은 위로와 울음이 함께 들리는 듯하다.
언젠가 만경강의 발원지, 밤샘을 찾아갔다가 태동하는 강의 울음을 들어본 적 있다. 샘을 따라 숲길을 걸으며 들었다. 연약한 물줄기가 모여 작은 개울이 되고, 개울이 바위나 흙더미에 부딪혀 혼탁해지고 빨라지거나 느려지면서 내는 소리. 샘이 강이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이 울어야 하겠는가. 크게 부딪혀 휘청해본 사람, 갈 길이 멀어 주저앉아본 적 있는 사람에게는 그의 울음이 들린다.
이제 철새가 지나간 자리에는 만경강의 적요만이 남았다. 하지만 강과 나는 지난겨울의 목격자가 되어 강은 강대로 나는 나대로 증언한다. 우리의 증언은 ‘있음’이다. 어떤 울음이, 존재가, 그들의 이야기가 여기 있었음을 전한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강과 나의 기억 속에 있다. 강이 흐르는 것은 시간과 기억을 나르는 일. 우리의 삶도 강처럼 흐르며 그런 것들을 나를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고 사라진 후에도 ‘있음’을 말할 것이다.

신유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