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스웨덴 예테보리대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가 발표한 ‘세계 민주주의 보고서’는 한국 민주주의 수준을 자유민주주의에서 선거민주주의로 낮췄다. 지난 2년간 가파른 하락세이며, 물론 불법 계엄의 여파가 크다.
민주주의 추락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보고서는 지난 25년 동안 세계가 독재화되어가는 생생한 증거들을 제시한다. 세계민주주의 수준은 벨 곡선을 그리며 후퇴하고 있고, 민주주의로 분류된 국가들 숫자는 1996년 이전으로 퇴화했다. 선거의 질이 나빠지고 있는 국가는 지난 20년간 2배 이상 늘었고, 언론의 자유가 뒷걸음치고 있는 국가도 무려 6배 이상 늘어났다. 20세기 초에 등장한 나치와 무솔리니의 파시즘, 소련과 중국의 대두 등 일련의 독재화 영향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세계는 다시 유럽의 극우화, 트럼프주의의 등장, 그리고 한국과 인도 등에서의 우려할 만한 독재화 시도 등을 목격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민주주의 추락은 ‘87체제’의 근본적 한계 때문이라는 주장들이 최근 설득력을 얻고 있다. 1987년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기 위해 시민사회의 힘과 지식이 급성장하던 시기였으며, 당시 직선제를 쟁취하기 위해 여러 가지 헌법적 흠결을 제대로 고치지 못한 채 급하게 개헌을 단행했다. 말하자면 지금의 헌정질서는 독재로부터 선거민주주의로 넘어가기 위한 ‘임시체제’였던 셈이다. 이렇게 보면, 앞에서 말한 세계 민주주의 보고서의 평가가 박하다고 하기 전에 우리가 가진 헌법과 제도적 장치의 수준이 기껏해야 선거민주주의 정도에 머물 위험성을 내장하고 있음을 시인해야 할지 모른다.
물론 민주주의의 발전이 법적 제도적 장치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여론과 장외투쟁은 또 다른 축이 된다. 지난 수십년 동안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에는 시민지식과 운동에 의한 민주주의 수호라는 또 다른 축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국 현대사는 끊임없는 민주주의 학습의 역사였고, 국민들은 교육과 학습을 통해 시민성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어찌 보면, 87체제는 그 당시를 가로지르던 민주주의 학습의 열기 속에 획득됐다고 할 수 있다. 1987년 6월 당시 시민들은 점심시간을 쪼개 진보정치의 강의를 들으러 다녔고, 반독재와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쟁론들이 시민들의 일상 토론거리가 됐다. 이렇게 학습한 넥타이 부대들이 거리로 나와 독재와 맞섰고, 87체제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렇게 보면 87체제로 일컬어지는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후진적 제도의 한계를 선진적 시민성이 학습을 통해 보완해가는 방식의 민주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체제는 시민담론의 중심이 흔들리는 순간 곧바로 쉽게 추락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특히 젊은층이 정치에 무관심한 요즈음의 상황과 맞물려 등장하는 극우세력의 음모론, 색깔론, 폭력, 아무말 대잔치 등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가 구축해놓은 민주주의의 품격과 수준을 시험대에 오르게 하고 있다. 감추어져 있던 정치 문해력의 민낯이 표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사실, 우리 정치사에서 성숙한 시민성이 제도정치 내부로 편입될 수 있는 참여정치의 공간은 늘 부족했고, 따라서 이러한 사회적 불만을 장외투쟁과 사회운동의 흐름으로 밀어내버렸다. 선거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선거에 이기면 모든 것을 휩쓸어 가져가버리는 방식 속에서 제대로 된 자유민주주의는 자랄 수 없다. 세계 민주주의 보고서가 말하듯이, 선거민주주의 단계를 넘어 완전한 자유민주주의로 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 제도적 조건이 필요하다. 즉 법 앞의 만인 평등과 정치적 자유, 사법부 독립 및 행정부의 헌법 준수 여부, 그리고 국회의 행정부 감시와 견제 기능 등이 선거민주주의 위에 덧대어져야 한다.
불행히도 최근 사태 속에서 우리가 보는 모습은 참으로 실망스럽다. 개인이 법 앞에 평등하지 않고, 대통령 권한대행은 헌재의 결정도 가볍게 무시하며, 국회의 입법은 줄줄이 정부의 거부권 대상이 되고 있다. ‘불법이기는 하나 탄핵할 만한 정도는 아니다’라는 말은 난센스다. 그 틈새를 통해 행정부의 권한남용은 계속 이어지며, 민주주의는 상처받는다.
아직 대통령 탄핵에 대한 헌재 판결은 나오지 않고 있다. 만일 이번 헌재 탄핵이 인용되지 않는 불상사가 발생한다면 1987년 끓어올랐던 그 시민운동의 힘이 다시 불붙게 될 것이며, 이러한 힘은 보수 논객 김진이 말한 것처럼 “극우들이 벌이는 시위와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제도권 정치가 선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제도권 밖의 운동 에너지에 의존하는 헌법 체계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