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의성군 안사면 안사리의 한 야산에서 27일 오전 김영숙씨(오른쪽)가 그의 아들과 함께 잔불을 끄고 있다. 백경열 기자
“불이 꺼진 것 같아도 바람이 불면 다시 살아난다니까. 저기 봐봐···.”
27일 오전 경북 의성군 안사면 안사리의 한 야산. 김영숙씨(65)가 불에 그을려 시커멓게 변한 나무 아래쪽을 갈퀴로 연신 긁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갈퀴가 지나간 자리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때 등에 물펌프를 멘 한 남성이 다가와 해당 지점에 물을 뿌렸다. 그제서야 연기가 사그라들었다. 이들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둘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다. 김씨는 평범한 농부다. 하지만 산불이 확산하자 ‘전사’가 됐다. 그는 의성군에서 산불이 발생한 이후 엿새째 산을 오르내리며 전문 소방인력을 돕고있다. 마을 사람 상당수는 피난길에 올랐지만 김씨 모자는 고향 마을이 불타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 없어 직접 화마와 맞섰다.
김씨는 “산불이 난 후 매일 오전 6시반쯤부터 오후 8시쯤까지 잔불 정리를 주로 한다. 차량에 필요한 옷가지 등을 싣고 다니며 현장을 찾아다니기 바쁘다”면서 “고향이 불타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나. 지켜야지”라고 힘주어 말했다.

경북 의성군 신평면 검곡리에 사는 오병화씨 집 뒤편 야산으로 지난 25일 오후 산불이 확산하고 있다. 오씨는 직접 호스를 잡고 비탈을 올라 물을 뿌렸다. 백경열 기자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아들 이상열씨(37)도 휴가를 내고 내려와 어머니를 돕고 있다. 이씨는 “타지에서 (산불 소식을) 뉴스를 접할 때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실제로 현장을 보니 너무 심각하더라”면서 “고향도 지키고 어머니도 돕기 위해 진화 작업에 자원했다”고 말했다. 이들이 잔불을 정리하던 야산 아래에는 민가 10여채가 있었다.
영남지역 대형산불이 장기화되면서 곳곳에서 주민들이 진화작업에 나서고 있다. 역대 최대 규모로 산불이 번지면서 소방 인력도 한계에 달하자 주민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이들은 농기구에 농약 대신 물을 받아 넣고, 밭이 아닌 불길을 향해 물줄기를 쏘아댄다.
산불 현장에서는 주민들로 구성된 민간단체의 모습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재난·안전분야 자격증을 보유한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경북안전기동대’ 소속 40여명도 산불을 잡기위해 연기가 솟아오르는 야산을 며칠째 누비고 있다.
이들은 산불을 비롯해 지진, 수해 복구 등을 돕는 민간조직이다. 이를테면 ‘주민 결사대’인 셈이다. 유재용 경북안전기동대장은 “이번 산불을 하루 빨리 꺼야겠다는 생각에 많은 대원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북 영덕군 영덕읍 매정리에서 지난 26일 한 70대 남성이 자신의 집에 물을 뿌리고 있다. 백민정 기자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회원들은 급경사지를 오르내리며 드론을 띄우는 중이다. 이들은 주민들이 잔불을 위치를 파악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경주에서 왔다는 회원 이경필씨(56)는 “산림과 문화재가 소실되는 상황에 마음이 너무 아파서 이 곳을 찾아 진화 작업을 돕는 중”이라면서 “불을 끄는 일에 있어서 소방대원은 물론 주민도 한 마음이지 않겠나”고 말했다.
본래 산불이 민가쪽으로 확산할 우려가 생기면 주민을 대피시키고 진화 작업을 하는 게 소방당국의 대처 원칙이다. 주민이 직접 불을 끄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이번 산불의 확산 속도가 너무 빠르고 불씨가 여기저기 퍼지는 등 급박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현장에서는 소방당국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회원들이 27일 의성군 안사리 야산에서 잔불 정리 작업을 돕던 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백경열 기자
실제 취재진이 의성군에서 산불이 시작된 지난 22일 이후 현장을 둘러본 결과, 집 주변까지 밀려온 불길을 잡기 위해 직접 주민이 물을 뿌리는 등 사실상 소방관 역할을 하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목격됐다.
의성군 신평면 검곡리에서는 지난 25일 자신의 집 뒤편까지 접근한 불을 끄기 위해 비탈길을 올라 물줄기를 뿌리는 남성이 목격됐다. 이 남성은 그의 아내와 기르던 가축 등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호스를 잡았다.
당시 그의 집에서 불과 20m쯤 떨어진 곳까지 불길이 내려온 상황이었다. 당시 검곡리에는 국도변 곳곳에 불씨가 떨어져 있었지만 소방 인력은 큰 불을 중심으로 진압 작전을 펴고 있었다.
집주인 오병화씨는 “바람이 강하게 불면서 불이 집 쪽으로 번지고 있다”면서 “소방인력을 기다릴 수 없어서 급한대로 직접 불을 끄고 있다”고 말했다.

경북 의성군 안사면 안사리의 한 야산에서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의용소방대 등이 잔불 정리 작업을 하고 있다. 백경열 기자
또 지난 26일에는 산불이 확산한 영덕군 영덕읍 매정리에서 70대 남성이 호스를 잡고 자신의 집을 향해 물을 뿌려대고 있었다. 집은 검게 그을린 채였지만 안쪽에서는 잔불이 살아 연기가 쉴 새 없이 나오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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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성은 “소방관이 다른 데 불을 끄러 가봐야 한다며 이거(호스)를 어떻게 쓰는지 알려주고 갔다”고 취재진에 전했다.
영덕소방서 관계자는 “소방 인력이 부족한 등 한계가 있어 마을회관에 모인 주민을 대상으로 초기 요령법을 알린 게 맞다”면서 “현재 진화 구역도 너무 넓다 보니 소방대원들도 산불 확산지를 순찰하면서 불이 붙은 게 보이면 그때 그때 끌 정도로 비상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