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복무 때였다. 부대 아래에서 산불이 났다. 부대에는 비상이 걸렸다. 산불을 끄기 위해 동원됐다. 이병. 혈기왕성하던 때였다. 삽 한 자루 달랑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불은 까마득한 밑에 보였다. 불기둥도 자그마했다. 산불이 난 쪽으로 내려서려는데 아래로부터 훅 하고 견디기 어려운 열기가 얼굴을 덮쳤다.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야 이병들은 옆으로 비켜.”
산불 진화 경험이 많다던 강원도 출신 중사가 크게 손짓하며 고함쳤다. 산불은 바람을 등지고 끄는 거라고 했다. 경험 없는 이병이 뭘 알았겠나. 산불의 열기가 그 정도인 줄. 산불에 맞서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것을.
짧은 경험이었지만 산불이 무섭다는 것을 그때 제대로 알았다. 경북 의성과 경남 산청·언양에 난 대형 산불을 보며 30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도로 양측 산기슭이 벌건 화염에 휩싸이고, 불덩이가 유령처럼 날아다니는 장면도 유튜브 동영상에서 봤다. 그 정도라면 차량은 뜨겁게 달궈졌고, 타이어는 녹아내렸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영덕에서는 대피하던 차량이 화염에 폭발했다.
산불이 난 지역에는 걸출한 산이 많다. 지리산, 주왕산은 물론이고 대운산 같은 도심 속 휴식 같은 산도 있다. 임하댐 근처의 그 아름답던 풍광들, 계곡들도 눈에 아른거린다. 천년고찰 고운사 같은 문화유산도 많다. 불은 20여명의 귀중한 인명과 함께 소중한 유산들을 함께 삼켜버렸다.
상상만 해도 이 상황이 끔찍하고, 안타깝고, 눈물 나는데, 온라인에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막말들이 넘쳐나고 있다. 주로 불이 영남 지역에 났다는 데서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댓글이 많다.
음모론도 나온다. 사회 혼란을 조장하기 위해 중공과 간첩이 고의로 방화했다는 둥, 김건희 여사의 호마의식(불을 이용한 종교의식)이라는 둥 근거도 없고, 출처도 알 수 없는 음모론이 온라인 커뮤니티나 유튜브 동영상에서 버젓이 유통되고 있다. 대형 사건사고가 나면 으레 있을 수 있는 반응이라고 보기엔 이번은 좀 심하다.
답답한 것은 막말과 음모론에 대한 반응이다. 말도 안 되는 억측이 올라오면 정상적인 다수에게 조리돌림을 당하던 과거와 달리 상당한 호응이 있다. 댓글에 댓글이 이어진다. 재난 앞에서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혼란이 가중되는 것은 대형 산불보다 한국 사회에 더 위험한 징조일 수 있다. 위기가 닥쳤을 때 힘을 하나로 모을 구심점도, 동력도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 지난 2년 10개월 동안 한국 사회는 유례없이 찢어졌다. 역대 대통령이 당연하게 여겼던 가치인 ‘통합’은 현 정부의 키워드가 아니었다. 건설노동자를 ‘건폭’으로 몬 것을 시작으로 금융권은 예대마진으로 폭리를 취하는 집단이 됐고, 교육계와 과학계는 카르텔로 똘똘 뭉친 집단으로 매도됐다. 일방적인 의대 정원 증원으로 의료계가 분열됐고, 12·3 비상계엄은 충성스러운 군과 경을 찢었다.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는 헌법재판소와 법원도 흔들고 있다. 다른 직역에 대한 존중은 사라졌고, 서로를 비판하며 불신하는 풍조가 광범위하게 퍼졌다.
탄핵 소추로 직무정지가 된 대통령은 여전히 부정선거 음모론에 심취해 있고, 지지자를 격려하는 메시지를 던져놓고 있다. 기대했던 사회 통합이나 승복의 메시지는 아직 없다. 갈라쳐서 상대를 지배하는, 검사 정부의 디바이드 앤드 룰(Divide and Rule) 전략으로밖에 볼 수 없다.
길어지는 헌재의 탄핵심판도 결과적으로 사회 분열을 가중시키고 있다. 헌재가 탄핵심판 선고를 늦추면서 부정선거 음모론은 기세가 꺾일 줄을 모른다. 여기에 더해 헌법재판관에 대한 각종 음모론도 대량 양산되고 있다. 산불과 관련해 온라인에서 드러나는 분열상은 2025년 3월 한국 사회를 정직하게 투영하고 있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산불은 오늘도 번지고 있다. 안동 하회마을이, 지리산이 더 위험해졌다고 한다. 하늘만 바라봐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 초현실적이다. 하긴 이태원 참사도, 제주항공 참사도, 12·3 계엄도 모두 초현실적이었다. 군이 국회의 창을 깨고 진입하는 것을 전 세계가 봤는데도 탄핵심판 결정이 내려지지 않는 작금의 상황도 초현실적이다. 그리고 이번 산불이 중공과 간첩에 의해서, 혹은 호마의식 때문에 일어났다고 당당히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참으로 초현실적이다. 답답하고도 잔인한 3월이다.

박병률 탐사기획에디터 겸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