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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돌봐야 살아진다

“너 싸가지 여물고 살아!”

최근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나라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한 장면에 나오는 대사이다. 애순과 관식, 이 어린 연인이 현실의 벽 앞에 생이별을 하는 모습을 온 마을 사람들이 마음 아프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관식을 태워 섬을 저만치 떠나가는 배를 향해 절망 속에 울고 있는 애순을 흘기며 관식의 모친은 욕을 내뱉는다. 그때 관식의 모친을 향해 옆 사람이 냅다 소리친 말이다. 아직 극중 상황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지만, 이 대사 하나에 괜히 속이 시원했다. 몇년 전 만난 한 용감한 여성이 생각나서였다.

군청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넘게 들어가야 하는 작은 시골 마을, 그 마을에 살던 여성은 어느 날부터 마을회관 주변에 출몰하는 구부정한 초로의 남성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동네에서 두 번째로 땅이 많은 부잣집의 잡일을 한다고 했다. 왠지 모르게 침울해 보이는 그 남성에게 인사를 건네보았지만, 남성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여성을 지나갔다. 그의 손에는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렇게 가끔 나타나는 그를 두어 달 지켜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손을 다쳤는지 붕대로 칭칭 손을 감고 있으면서도 풀 베는 낫을 그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왜 다친 손으로 일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쇠죽 끓여야죠”라고 힘없이 대답하곤 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남성의 집까지 쫓아간 그 여성은 아픈 손으로 마당의 풀더미를 옮기고 있는 그를 향해 빨리하라고 소리 지르며 욕하는 부부를 마주하게 됐다. 무슨 용기인지 왜 그러냐 묻던 이 여성에게 부부는 남의 가정사에 왜 오지랖이냐며 비아냥댔고, 이어 옥신각신 말싸움이 벌어졌다. 알고 보니 그 남성은 지적장애인이었고 부부의 가족도 아니었다. 이를 지적하자 부부는 오갈 데 없는 장애인 먹여주고 재워준 값을 자신들이 받아야 한다며 오히려 큰소리였다. 그때 이 여성은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큰 목소리로 “인간이면 인간답게 살아” 소리치고 그 남성을 데리고 나왔다. 이 작은 사건을 계기로 그 남성은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여기저기 아파야 했던 오랜 과거를 털고 새 삶을 찾을 수 있게 됐다.

피해자의 변호사로서 가해자들의 엄벌을 탄원하며, 나는 그 여성을 존경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던 피해자의 편에 서서, 보복당할 위험을 감수하며 같은 마을 사람에게 인생 똑바로 살라고 호통친 그였다. 못 본 척 자기 갈 길 갔어도 뭐라 하는 사람 하나 없었을 텐데, 그는 익명에 숨거나 뒷담화로 돌아가지 않았다. 가해자의 면전에 던진 그의 외침 덕에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이 통째로 변화된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고되어도 내 곁의 사람을 살리는 일은 국가나 시스템이 아닌 사람이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던 5년 전 이맘때, 보건 당국의 긴급 통제 속에 서로를 살렸던 것은 자원봉사자와 시민들이 만들어 나눠준 마스크였다. 사람들은 고위험군인 노인들과 면역력이 약한 이웃을 위해 자발적으로 식품이나 의약품을 문 앞에 배달해 주기도 했다. 주변을 살피며 돌보는 공동체가 위기에서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연일 혼란의 연속이다. 대통령 권한대행 중 탄핵소추된 국무총리에 대한 탄핵심판이 기각되고, 며칠 후 야당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형사재판 항소심에서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했다. 벌써 몇달째 전국에서 대통령 탄핵 찬성과 반대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주 내내 역대 최악의 산불이 경북을 뒤덮어 많은 인명피해를 낳았다.

며칠 후 식목일에 까맣게 타버린 터전을 보며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내 일처럼 여기는 작은 돌봄의 관계들이 이 혼란의 시절에 놓인 우리를 살게 만들지 않을까.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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