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끌기가 경제적 성패를 좌우하는 현상을 ‘주목 경제’(economy of attention)라고 한다. 온라인에서 흘러넘치는 정보와 미디어가, 제한된 인간의 주목을 놓고 경쟁하는 세상이다. 시장 상인이 손뼉 치며 외치듯, 언론은 자기 기사를 클릭해달라며 ‘속보’ ‘알고 보니’ ‘충격!’ 등의 어구로 시선을 끌려 한다. 유튜브 알고리즘도 이용자의 성향을 분석해, 클릭할 수밖에 없는 영상을 무한 공급한다. 그 결과는 기존 신념에 맞는 정보만 지속·증폭·강화되는 ‘메아리 방(echo chamber) 효과’이며, 그 끝은 우리가 지금 생생히 경험하는 정치적 극단화다.
과거에는 몇 안 되는 언론에 의해 정책이 채택되는 게 중요했다면, 지금의 초경쟁 미디어 상황에선 ‘얼마나 주목받느냐’가 정치인의 최대 관심사가 됐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상관없이 언론에 나면 좋다는 게 정치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더 강한 발언과 더 극단적인 행동으로 관심받으려 한다. 과거에 어떤 행보를 했는지는 의미 없다. 지금 당장 그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더 눈에 띄게 비판하고 찬양하고 행동하는지가 중요하다. 과거에 내 편이었든, 네 편이었든, 다선 의원이든, 한때 반대당이었든 상관없다. 유튜브 정치 채널에 불려가 함께 북 치고 장구 치며 시선을 끌면 그만큼 공천 가능성이 올라간다. 기성 언론 내용이 극단적 성향의 이용자들에 의해 끌려가듯, 정치인도 지지자들에 의해 끌려간다.
탄핵 정국에서 일부 개신교 집단도 틈을 파고들어 동원력을 과시하며 거리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주목을 끌어내는 힘이 이곳에 있는 한 제도권 정치인들도, 기성 언론도, 유튜브도 이들에 기댄다. 한 사회의 구성 주체로서 특정 종교인이나 종교단체가 정치적 태도를 밝히는 것 자체는 나쁠 것 없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하는 바가 반민주적이고 폭력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 문제다. 전광훈 목사는 최근 집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당한다면 “내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라고 하며, 반대로 기각되면 “국민저항권을 발동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국회를 해산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손현보 목사 또한 “나라 살리려면 계엄 말고는 답이 없었다” “헌재는 산산조각 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교회도 주목 경제에 잡혔다. 개신교 교단과 목회자 대부분은 극우 집단이 교회를 대표하는 듯한 일에 침묵하고 있다. 이는 동의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과학적 진보와 사실에서 동떨어진 한국의 많은 개신교회는 주목받기 쉬운 차별금지법 반대 기치로, 줄어가는 교인을 움켜쥐려는 중이다. 거리에 나와 혐오와 차별을 외치는 극우 신도들과 공유하는 가치다.
어느 주류 교단은 성소수자를 위해 기도해줬다는 이유로 목사 여럿을 출교했다. 다른 주류 교단은 목사 후보자들에게 “인간에겐 남자와 여자라는 두 가지 성별만 존재한다”는 반과학적 내용의 서약서를 버젓이 강요한다. 어느 유명 신학대학교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것이 과학적 사실임을 주장하는 사이비 과학, 이른바 ‘창조과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한 교수를 해임했다가 국가기구의 제동을 받았다. 나는 개신교 신자로서 이런 경향이 사랑과 포용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일부 목사는 이를 알고도 신도들의 반발과 외부의 공격을 의식해 비판을 자제하고 있다. 주목 경제 시대에 언론과 정치인이 따르는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언론인과 정치인, 그리고 종교인에게 직업적 전문성과 윤리의식을 기대한다. 이 기대는 현실에 끌려가지 않는 것, 즉 이용자의 필요에 민감해야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바대로만 맞춰가지 않는 것을 포함한다. 제도적 변화로는 주목 경제를 해결할 수 없다. 폐해를 헤쳐나가 새로운 길을 제시해야 할 주체들이 도리어 이에 편승한다면 이 직업과 조직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강형철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