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백의 사연 史淵]책 ‘Song of Ariran’의 동북아 문화사](https://img.khan.co.kr/news/2025/03/31/l_2025040101000010900092571.jpg)
김산의 회고록만큼 여러 국가에서 번역한 경우는 없다. 심지어 북한에서도 <아리랑의 노래>를 펴낼 정도였다
일본, 중국, 한국에서 김산의 자서전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눈을 뜨게 하는 매개물이었다. 그러면서도 각자의 맥락이 있었다
특히 한국서 김산의 자서전은 민주화 과정에서 이념의 벽을 넘어서며 민족독립정신도 들여다보고, 개인 삶의 자세도 되돌아보게 했다
한국 근현대사에 흔적을 남긴 인물 가운데 영어책으로 세상에 소개된 최초의 인물이 김산(金山)일 것이다.
그는 1905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15세인 1920년 최연소 신흥무관학교생이 된 이후 격렬한 중국혁명의 현장에 뛰어들었다. 그에게 중국혁명은 조선 독립을 실현하는 과정의 일부였다. 하지만 1938년 트로츠키주의자, 일본 간첩으로 몰려 동지들에게 처형당했다. 이 직전인 1937년 여름경까지의 인생 역정을 기록한 책이 <Song of Ariran>(1941)이다.
책의 공동 저자인 님 웨일스와 김산의 만남은 중국공산당이 있는 옌안에서 시작되었다. 웨일스가 노신(魯迅)도서관에서 영문책자 등 광범위한 책을 빌려 간 김산의 이름을 보고 호기심이 발동해서였다. 그는 영어로 대화할 사람이 몹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웨일스는 김산과 만날수록 그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예의 바르면서도 불덩이 속에서 형성된 힘을 바탕으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며 공포를 모르는 독립심을 가진 사람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김산도 기회로 간주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했으므로 만주 등지까지 전쟁이 확대되어 독립운동이 다시 일어났을 때 한국 문제를 세계에 알릴 기회로 보았기 때문이다.
책, 경계를 넘다
책이 나오자 가장 먼저 아시아·태평양 전쟁 때 조선에 관한 정보가 부족했던 미국 정부가 참조했다. 하지만 전쟁 후 용도가 끝났다. 한국에서도 신천지라는 월간지에서 1946년 10월부터 16회에 걸쳐 연재하다 중단되었다. 해방공간의 좌우갈등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책의 울림은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 10월 첫 번째 번역서인 <아리랑의 노래>가 일본에서 나왔다. 같은 번역자가 1965년 다른 출판사에서 책을 재간행했다. 홍콩에서도 1977년 출간됐다. 한국에서도 1984년 <아리랑>이란 제목으로 출판사 동녘에서 나왔다. 하지만 이때까지 웨일스와 공동 저자인 ‘김산’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렇게 격정적인 삶을 살아간 사람이 있었음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도 있었다.
그런데 1985년 김산의 본명이 장지락임을 아는 사람이 중국의 길림신문에 글을 연재했다. 이 필자는 처형당한 사실을 포함해 그의 일대기를 <조선족혁명렬사전> 제2집(1986)에 공개했다. 김산이 중국조선족 역사에 공식 편입된 것이다. 이는 김산이 아들의 노력으로 1983년 무죄를 받아 당에 복권되어 가능했다.
새로 드러난 사실을 반영한 첫 번역본이 연변에서 간행된 <백의동포의 영상>(1986)이다. 김산이 완성하지 못한 소설의 제목을 차용한 이 책은, 1965년 일역본이 저본이었다. 1993년에도 간체 번역서가 나왔다. 또한 일본에서는 1972년 영어본을 저본으로 한 세 번째 번역본이 1987년 출간됐다. 가지무라 히데키와 미즈노 나오키가 충실하게 보완 설명함으로써 번역본의 완성도를 높였다.
중국,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는 동녘의 번역본이 사실상 유일하다. 다만, 갈릴리문고가 김산과 웨일스 공저로 <아리랑의 노래>를 1985년 한 차례 간행했다. 대신 <아리랑 2>라는 책이 1986년 학민사에서 나왔다. 1961년 웨일스가 자비출판한 <노트>의 일역본을 다시 번역한 책이다.
1990년대부터 한국에서 여러 연구 결과가 나왔음에도 번역서의 보완 설명은 일역판만큼 충실하지 않다. 그러나 김산과 관련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그의 일대기를 다큐멘터리로 방송하고 평전을 냈으며 만화로도 제작했다. 학술회의도 열렸다.
이러한 시도는 모두 21세기에 있었다. 한국 사회가 1987년 정치적 민주화를 달성하고, 세계적인 차원에서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이념의 좌표찍기가 완화한 결과였다. 한국 정부가 2005년 김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웨일스에게 보관문화훈장을 추서한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리랑의 노래>가 일본 식민지배와 독립운동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김산의 회고록은 1980년대까지 한국에서 연구한 독립운동사 수준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들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책, 각자의 맥락에서 발화하다
이렇듯 동아시아 근대사와 관련한 자료나 책 가운데 김산의 회고록만큼 국가를 넘어 여러 곳에서 번역한 경우는 없다. 심지어 북한에서도 1992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산을 언급한 이후 <아리랑의 노래>를 펴낼 정도였다.
누군가 주도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김산의 회고록과 각자의 처지 사이에 맞닿은 어떤 지점이 있어 가능한 현상이었다.
한국의 리영희는 1959년 가을 미국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도쿄의 서점에 들렀다가 1953년 일역판을 구입해 왔다. 훗날 그는 책을 처음 읽고 “받은 감동은 그 후 나의 삶의 방향과 내용에 지울 수 없는 크고 깊은 흔적을 남겼다”고 회상했다. 중국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친 <전환시대의 논리>(1974)가 그 흔적의 하나일 것이다.
리영희가 가지고 온 책은 마음과 사상이 통하는 벗들 사이에서도 표지를 가린 채 그늘에서 돌려졌다. 소리 없이 돌아다닌 책은 읽은 사람들의 의식에 눈을 뜨게 하고 가슴에 불을 지피었다. 1980년대 중반 소설가 박경리를 끝으로 리영희의 손에 돌아왔다. 만주지역 독립운동사 논문을 다 합해도 10편 겨우 넘는 시절이었으니, 박경리는 <토지>를 집필할 때 독립운동가와 혁명운동에 관한 상상에 큰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리영희는 재일조선인 학자 강덕상이 협력한 1965년 일역판의 재간행을 알고 있었다. 일역판은 이전과 달리 5년도 되지 않아 6쇄를 발행할 정도로 일본에서도 읽는 사람들이 늘었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없던 1953년과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해 6월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일본과 한국 사이에 오고 가는 길이 자유로워지고 일본 자본의 진출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들에게 김산의 자서전은 조선사의 주체인 조선인에 대해 새롭고 풍부한 이미지를 주는 자료였다. 게다가 김산은 국가가 없는 조선인의 전체 삶이 일본, 중국, 러시아와 연결되어 있어 조선인이 혁명의 시대에 매우 훌륭한 국제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 그는 조선인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래서 동북아시아 국제주의자의 회고록은 일본에서 지역의 역사와 현상을 배우기 위한 문헌의 하나로 간주하는 지역 문제의 필독서였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서도 한국은 이렇게 자유롭지 못했다. 발행되자마자 금서였고, 출판사도 탄압받아 자유롭게 판매할 수 없었다. 1986년 이념서적을 판매한 서점을 수색하며 처음으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할 때도 회고록이 근거였다. 난관은 정치적 민주화를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었다. 여기에 많은 사람이 뛰어들었다. 뛰어든 사람들에게는 결단이 필요했다. 고뇌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무수히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김산의 회고록은 그 물음에 대한 답변서였다. 김산은 독립이란 시대의 과제를 실현하려는 시대정신을 갖고 주변의 상황과 매우 치열하게 대결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김산의 삶은 또 다른 측면도 보여주었다. 미래를 얻고자 지옥과 같은 역경을 견뎌내는 강한 생명력을 보여줬다. 그 과정에서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내면의 흐름을 사실적으로 깊이 있게 드러냈다. 금서목록에서 빠지는 순간부터 교양한국사의 독후감 과제물로 유행했고, 오늘날까지도 대학생에게 읽어보도록 ‘고전추천도서’나 ‘권장도서100’에 포함한 대학이 있는 이유이다.
일본에 승리한 이후 중국에서도 김산을 언급하기는 불가능했다. 그의 사형을 결정한 강생(康生)이 1975년까지 살아 있는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은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든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거나 덮어야 했다. 연변의 조선족은 문혁 과정에서 손상된 민족전통과 민족정서를 회복하고, 중국 사회에서 소수민족이자 공민으로서 존립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다. 이를 통해 민족 긍지를 느끼고, 혁명전통을 가꾸어 정신문명 건설에 합류해야 했다. 죽은 김산은 복권되자마자 ‘독립’을 거세당한 채 조선족 열사로 편입되어 중화민족의 집단 정체성 만들기에 동원되었다.
일본, 중국, 한국에서 김산의 자서전은 한국(조선)과 한국인(조선인, 조선족)에 대해 눈을 뜨게 하는 매개물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각자의 맥락이 있었다. 특히 한국에서 김산의 자서전은 민주화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이념의 장벽을 넘어서며 민족독립정신도 들여다보았고, 개인 삶의 자세도 되돌아보게 하는 자료였다.
![[신주백의 사연 史淵]책 ‘Song of Ariran’의 동북아 문화사](https://img.khan.co.kr/news/2025/03/31/l_2025040101000010900092572.jpg)
역사학자.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한국근현대사를 동아시아사에 접목하여 연구하며 현재를 고민하고 있다.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출발하여 최근에는 <한국역사학의 전환> <일본군의 한반도 침략과 일본의 제국운영> 등을 간행했다. 저서 <역사화해와 동아시아형 미래만들기>, 이외에 공저로 <용산기지의 역사> <분단의 두 얼굴>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