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의 거리두기]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https://img.khan.co.kr/news/2025/04/01/l_2025040201000039600003112.jpg)
정치가 실종되고 온통 법률만 따지는 사회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사회다. 사람들은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법치주의로 이해하고, 모든 것을 법에 따라 해결하는 것이 민주적이라고 생각한다. 오해이고 착각이다. 법치주의는 민주주의에서 양날의 칼이다. 법 규범의 내용이 이성적이고 입법 과정이 정당하고 법 운용이 합리적이라면, 민주주의는 실제로 ‘법의 지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역사적 사례와 현재 신권위주의 정권에서 볼 수 있듯이 법은 국민보다 독재자의 이익에 맞게 설계될 수도 있다. 법률 시스템은 엄격한 절차를 따르지만, 그 법률이 비이성적이거나 억압적이거나 선택적으로 시행된다면 여전히 부당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법치주의가 그 자체로 민주적인 것은 아니다.
정권이 안정되고 세상이 편안할 때는 사람들이 별로 법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일반 사람이 법을 접하게 되는 것은 대체로 송사에 휘말릴 때이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법률 용어, 까다로운 절차, 고압적인 법률 전문가 등을 겪고 나면 사람들은 법 이야기를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법은 언제나 갈등과 불화를 전제한다. 우리가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사람을 통상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법이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다.
노자 식으로 얘기하자면, 최고의 정치는 국민이 법이 있다는 것만 아는 것이다. 차선의 정치는 국민이 법을 신뢰하고 자랑스러워하고, 그다음의 정치는 국민이 법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최악의 정치는 국민이 법을 신뢰하지 않고 하찮게 여기는 정치다.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시기에는 사람들은 법이 있다는 것만 안다. 사법부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모든 일을 현명하게 잘 판단할 것이라고 믿는다. 국민이 모두 법을 들먹이고, 법을 정치적 입장과 진영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는 법을 하찮게 경시한다면 그것은 정치가 최악이라는 분명한 징후이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대화와 토론, 숙의와 합의를 생명으로 하는 정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온통 사법이 채우고 있다. 탄핵 소추, 인용, 기각, 각하와 같이 평상시 들어보지 못한 법률 용어가 난무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듣고 있는 유튜브의 성향에 따라 사태를 해석하느라 정신이 없다. 어떤 사람은 윤석열 대통령 소추안의 인용을 확신하고, 어떤 사람은 거꾸로 기각과 각하를 굳게 믿는다.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신념과 확신을 중재하여 화합에 이르게 할 현명한 재판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 판결이 나오든 국민의 반은 사법을 좀처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 사법화는 타협과 대화 포기
정치가 사법화하면 사법부의 정치화를 초래하고, 결국은 우리의 삶과 사회를 안정시킬 헌법기관에 대한 불신을 가져올 것이다. 대립적이고 적대적인 양당으로 인해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함에 따라 사법부는 점점 더 정치적 갈등의 전장이 됐다. 정치적 분쟁이 입법부와 행정부에서 사법부로 이전되는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정치의 사법화’라고 말한다. 법원이 이상적으로는 민주적 심의와 타협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를 풀어주도록 요청받을 때 정치의 사법화는 발생한다.
논란이 되는 정치적 문제를 판결하기 위해 헌법재판소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국가와 정치의 중대사는 결국 9인의 헌법재판관 손에서 결정된다. 헌법재판관은 결코 현대의 현자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떤 헌법하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논하지 않는다. 그들은 헌법의 합리성과 정당성을 따지지 않고 ‘주어진 헌법’을 법리적으로 해석해 적용할 뿐이다. 그들은 법률 해석 전문가인 까닭에 결국은 ‘양심’이라 불리는 개인적 성향에 따라 판단한다. 사회의 갈등이 심할수록 법적 원칙보다는 당파적 입장과 정치적 고려 사항에 의해 영향받을 가능성이 커지는 이유다. 이렇게 정치의 사법화는 결국 ‘사법의 정치화’를 초래한다.
정당이 입법적 타협을 통해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법원과 헌법재판소에 맡기면, 이러한 정치의 사법화는 오히려 이념적 분열을 심화하고 사법적 중립성에 대한 국민 불신을 조장한다.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타협과 합의를 생명으로 한다. 정치의 사법화는 타협과 합의를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심의의 본질은 훼손되고, 제도적 정당성은 약화한다. 정치의 사법화는 이념적 분열을 고착시켜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왜 우리 정치가 이렇게 망가졌는가? 누가 이러한 위기 상황을 초래했는가?
지금의 탄핵정국에서 사람들은 윤석열 대통령을 정치적 악으로 단죄하는 경향이 있다. 여러 번에 걸쳐 강조하였지만, 윤석열이 사라진다고 우리 정치가 좋아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가 악이라면, 무분별한 줄 탄핵으로 헌정질서를 교란한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역시 악이다.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라는 최악의 정치를 초래한 당사자들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국민의 관심이 온통 두 명의 정치인에게 쏠려 있지만, 문제는 이러한 최악의 정치를 초래한 우리의 정치 구조이다. 왜곡된 정치 구조를 바꾸고 타협과 합의의 정치를 다시 복원하려면, 우리는 결국 헌법을 바꿔야 한다.
물론 헌법 개정을 논의하려면, 지금의 탄핵 사태를 우선 해결해야 한다. 국민이 심판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헌법기관 자체를 불신하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 그런데 정치권은 정권 획득이라는 이익에 눈멀어 국민을 선동하느라 여념이 없다. 불법적 위헌적 계엄을 선포한 것은 윤석열 대통령이다. 그런데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이 입법권을 독점하여 국정을 마비시킬 정도로 탄핵을 남발한 것도 사실이다. 민주당의 유일한 항변은 기껏해야 우리는 모든 것을 법률에 따라 행한 것일 뿐 위법을 저지르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제는 법 형식주의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점이다.
사법부는 삼권분립 지켜낼까
우선은 사법을 신뢰하고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해야겠지만, 우리는 동시에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법의 존재만으로 민주주의가 보장되지 않는다. 권력만 추구하는 정권이나 독재자들은 언제나 공동의 이익보다 개인적 또는 당파적 이익을 위해 법률을 제정했다. 깨끗이 면도한 얼굴을 포함한 서유럽 관습을 채택하여 러시아를 현대화하려고 했던 표트르 대제가 수염을 유지하고자 하는 남성에게 세금을 부과했다는 것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다. 전체주의 국가는 단 한 명의 후보만 허용하는 선거 제도를 도입하여 국민의 실질적 선택권을 제거하고, 어떤 나라는 범죄를 저지른 본인뿐만 아니라 최대 3대까지 온 가족에게 처벌을 내린다. 모두 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런 법적 형식주의는 정의보다는 억압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이렇게 말이 되지 않는 법을 통과시키는 정당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법률 형식주의가 합리적 정당성을 거스르면 여전히 부조리한 법률이 만들어진다. 정당성이나 공정성과 상관없이 법적 절차를 엄격히 준수하는 법적 형식주의는 그것이 설령 비이성적이거나 해로운 결과를 낳더라도 법이 준수되는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권위주의 정권은 합법성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반대를 침묵시키고, 정치적 억압을 정당화하고, 통제를 유지하는 데 법을 이용한다. 어떤 정당이 다수결 원칙에 따라 자신의 당파적 이익에 맞는 법을 쏟아낸다면, 국민은 장기적으로 입법부를 신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법 자체를 신뢰하지 않게 된다. 특정 집단의 이익에만 부합하는 법은, 그것을 아무리 국민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치장하더라도, 보편적 정당성을 상실한다. 독재적이지 않은 환경에서도 과도한 법률 형식주의는 윤리적 적용보다 기술적 준수를 우선시함으로써 민주주의를 훼손한다.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를 초래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정치의 양극화이다. 법원이 정치적 역할을 맡게 되면, 사법부는 중립적인 중재자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국민의 신뢰를 잃을 수 있다. 사법부는 사실 법률을 만들지 않고 적용할 뿐이지만 모든 사람이 법률을 따르도록 확실히 해야 한다. 사법부가 독립적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사법부가 정치적 분쟁에 과도하게 개입하거나 영향을 받으면 합법성을 훼손하고 오히려 정치적 양극화를 악화시킬 위험이 있다. 우리의 사법부는 과연 정치에 휘둘리지 않고 삼권분립을 지켜낼 수 있을까?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