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특히 팬데믹 이후 미국 경제의 성과가 두드러진다. ‘미국 예외주의’ ‘미국식 역동성’이라는 현상이다. 미국의 생산성은 설비 및 연구·개발(R&D) 투자 외에 인재·자본·기술의 이동이 쉽고 첨단 분야에서 기업의 진입과 성장이 꾸준히 이루어지는 점에 기반한다. 낮은 규제와 유연한 시스템이 미국적 강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트럼프는 인공지능(AI) 안전성, 개인정보, 빅테크 독점성, 크립토, 금융, 방산, 핵, 우주산업 등에 포괄적 규제 완화를 공약했고 이를 정부 개혁과 연결 짓고 있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 총재도 유럽이 디지털 및 AI 혁명에서 뒤처진 원인으로 과잉규제, 시장분절, 의사결정의 파편화를 지적한다. 모디 인도 총리, 영국 노동당 정부,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베트남 공산당도 규제 및 관료주의 개혁을 핵심과제로 삼고 있다.
많은 정부가 규제 완화를 추진하지만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규제 수준이 낮은 미국에서 더 공격적인 규제 완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첫째, 규제의 이익은 소수에 귀속되지만 비용은 사회 전체에 분산된다. 모든 규제는 존재 이유가 있고, 국민이 안전하게 생활하고 경제적 기회를 공평하게 누려야 한다는 정부의 기본임무에서 비롯된다. 인터넷이 등장하면 이용자 보호가 필요하고, 지구환경이 중요해지면 탄소 배출·플라스틱 사용 등 환경규제가 강화된다. 금융위기로 시장의 자정 능력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 금융규제가 추가된다.
반대로 규제 완화의 이익은 다수에게 조금씩 나타나지만, 손실은 특정 집단에 집중된다. 기득권의 저항이 강한 이유다. 규제 조항은 소송 가능성을 예고하고, 의사결정을 지연시킨다. 주택건설 관련 촘촘한 규제는 주거비 상승을 초래하고, 전력망 연결과 핵심광물 채굴에 대한 주민동의 절차는 에너지 전환과 공급망 강화라는 국익과 상충하기도 한다. 규제는 제도를 복잡하게 만들어 로비 여지를 넓히고 신생 중소기업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경제발전은 ‘창조적 파괴’를 기반으로 하는데, 기득권은 이를 두려워한다. 정부가 창조적 파괴와 기득권 중 어느 편을 드느냐가 규제 완화의 성패를 가를 수 있다.
둘째, 규제는 또 다른 규제를 낳는 경향이 있다. 규제자는 규제 확대가 자신들의 권한 강화임을 잘 안다. 새로운 규제 대상을 계속 찾으려는 동력이 생긴다. 인허가 등 직접 권력이 될 뿐 아니라 퇴직 후 취업, 조직의 인력 충원, 승진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인센티브도 비대칭이다. 적극 행정을 하면 보상은 불확실한 반면, 규제 완화 후 사고가 나면 책임이 뒤따른다. 잘 보이지 않으면서 정부 기능을 약화하는 정부 내의 기관 간 규제도 계속 존치된다.
미 대선 과정에서 표출된 ‘바꿔보자’는 심리도 정부 비효율, 부당한 간섭과 경제활동 지체, 관료적 형식주의, 세금 낭비에 대한 반감이 기득권·엘리트 혐오와 결합한 측면이 있다. 미국의 규제 수준이 낮다고 하더라도 미국민은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셋째, 좌우 정파를 넘어 규제 완화가 글로벌 추세가 되고 있다. ‘큰 정부 대 작은 정부’ ‘규제 강화 대 축소’의 대비보다 규제로 인한 국민 불편을 해소하려는 실용적 접근이 부각된다. 좌파 정당은 높은 금리, 늘어나는 국가부채 아래서 성장 없이는 복지를 유지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했다. 우파 정당은 기업활동을 위축시키고 국민 불만을 낳는 규제에 대해 반기득권이나 경제적 자유를 내세워 대응한다.
넷째, 결국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의 문제다. 과감해야 성공할 수 있지만, 무모해서도 안 된다. 기득권의 저항을 돌파해야 하지만, 심판으로서의 정부 역할은 유지해야 한다. 규제 완화의 과정이 잘못 관리되면, 오히려 투자와 기업활동을 저해한다. 과감성은 규제가 강하고 저성장이 심각한 유럽에서 더 필요할 것이다. 정부효율부 같은 조직을 만들어 먼저 공격적 규제 완화를 단행했어야 한다는 반성이 유럽 내부에서 나온다.
대공황기를 연상케 하는 불확실성과 격차, 각자도생, 트럼프 복귀와 기존 질서 재편, AI 등 기술 격변 속에서, 더 능력 있는 정부가 더 적극적인 정책을 펴야 한다. 202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다론 아제모을루의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와 <좁은 회랑>의 주제인 제도, 인센티브, 성숙한 시민사회는 정부 역할이 핵심이다. 규제 완화는 피할 수 없는 과제라는 점과 추진 과정의 과감성과 안정성, 제도의 포용성 강화라는 방향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협상론의 한 원칙인 “결과에 합의하려 하지 말고 먼저 기준에 합의하라”가 떠오른다. “분야별로 경쟁국 규제 수준에 맞춘다”는 사회적 합의 도출에서 시작하면 어떨까.
이호승 전 대통령실 정책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