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 회관에 부착된 증원 반대 포스터가 붙어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으로 교착 상태에 빠진 의·정 갈등이 변곡점을 맞았다. 정부의 일방적인 ‘2000명 의대 증원’과 12·3 비상계엄 포고령의 ‘전공의 처단’ 내용 등 의대 증원은 윤석열 정부의 대표 정책으로 꼽혀왔다. 그동안 정부를 강하게 비판해왔던 의료계가 윤 전 대통령 파면을 계기로 잇따라 대화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어 사태 해결의 물꼬를 틀 수 있을지 주목된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지난 4일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 직후 “현 정부는 남은 임기동안 의료농단 사태를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한다”며 정부와의 대화 가능성을 열었다. 의협은 ‘탄핵선고 인용에 대한 입장’에서 “잘못된 의료정책들을 중단하고, 의대 증원과 필수의료정책패키지 등을 합리적으로 재논의 할 수 있길 기대한다”며 직접 대화에 나설 의지를 밝혔다. 의협 관계자는 “대통령 파면으로 상황이 변한 만큼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며 “정부가 제의 한다면 만나서 대화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각종 의사단체들 역시 의협과 유사한 입장을 밝히며 힘을 실었다.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윤 대통령의 독단으로 실행된 모든 의료 정책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며 “사태 해결을 위한 건설적인 대화의 장이 열리길 바란다”고 밝혔다. 전국의과대학 교수협의회 역시 “정부는 ‘의료개혁’으로 포장된 일방적인 의료정책 강행을 멈추고, 의·정 대화를 통해 합리적인 의료정책을 추진하기 바란다”는 입장을 냈다.
윤 전 대통령 파면과 함께 의료계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두고는 조기 대선으로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의료계에 절대적으로 유리하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의대 정원 증원의 방향이나 지향은 바람직하다”고 피력했다. 또 민주당과 국민의힘 모두 공공의대 신설에 긍정적이다. 의료계 내부에선 “의협이 투쟁보다 단일 협상안을 만들어 유력 대선 주자 등에 제시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동시에 의협은 오는 20일 서울에서 ‘전국의사궐기대회’를 열고 최대 강도의 압박을 이어나간다는 방침도 밝혀 ‘대화와 투쟁’을 병행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1년여 만에 재개되는 집회는 ‘윤석열 없는 윤석열 정부’와 대선국면에 돌입한 여야 정치권을 향한 압박이 될 전망이다.

서울 시내 한 병원에서 의료진이 가방을 메고 이동하고 있다./연합뉴스
의료계가 정부와의 대화 테이블에서 논의할 주요 의제는 2027학년도 이후 의대정원을 논의하게 될 ‘의료인력 수급 추계위원회(추계위)’와 의료개혁특별위원회(의개특위) 활동 등 크게 두 갈래다. 추계위 설치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의료계는 이를 독립성, 전문성, 투명성을 담보하지 못한 기구로 보고 있다. 의협 관계자는 “정부가 추계위 구성을 어떻게 하겠다고 의협에 알려오면 참여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며 “추계위는 정부 입맛대로 따라가는 거수기가 아닌 보건의료발전계획을 명확히 수립하고 보건의료정책 제도를 깊이 있게 논의하는 구조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의협은 정부가 추진 중인 추계위와 별개로 의사인력을 추계할 수 있는 자체적인 기구를 만들고, 매해 필요한 의사 수를 검증한다는 방침이다.
의개특위가 수행 중인 의료개혁은 이미 1차 실행방안에서 상급종합병원의 구조전환 등을 발표했고, 2차 실행방안에서 비급여·실손보험 개혁, 필수의료 관련 사고 시 중과실 위주 기소 등을 발표한 상황이다. 의개특위는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된 지난 4일에도 제17차 전문위원회의를 열며 3차 실행방안을 논의했다. 의료계는 이를 ‘명분 없는 아집’이라고 비판한다. 의협 관계자는 “대통령 직속위원회인 의개특위가 대통령이 파면된 상황에서 새로운 논의를 이어가는 것이 맞냐”며 “논의를 멈추고 그동안 논의한 자료를 잘 정리해서 다음 정부에 넘겨줄 준비를 할 때”라고 말했다.